구암한백겸묘및신도비(久菴韓百謙墓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16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가마섬길 43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구암(久菴) 한백겸(1552∼1615) 선생의 묘지이다. 그는 선조 12년(1579) 생원시에 합격한 후 벼슬길에 들어섰다. 선조 18년(1585)에는 정술(鄭述)과 함께 교정랑청(校正郞廳)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 때, 모반에 실패하여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럽게 장례 지내준 사실이 발각되고, 정여립의 생질(牲姪)인 이진길과의 친분이 문제가 되어 장형(杖刑,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죄를 면하고, 관직에 재임용되었다. 선조 40년(1607)에는 장예원 판결사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어 대동법(大同法, 1608~1894)을 시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선조가 승하 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그리고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역사·지리를 연구하여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를 저술하였으며, 조선 후기 실학 연구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 밖의 그의 저서로 『구암유고(久庵遺槁)』, 『기전고(箕田考)』 등이 전하고 있으며, 원주의 칠봉서원에 제향되었다.
한백겸의 묘역은 부평리 가마섬 마을 입구에 있는 신도비의 뒤쪽 청주 한씨 세장지에 위치한다. 조부 한여필(韓汝弼)의 묘역 바로 위에 자리하며, 앞으로는 섬강이 흐르고 있다.
묘역에는 봉분을 비롯하여 상석, 혼유석, 묘비가 있고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봉분 앞에 있는 묘비는 월두형의 비신으로 전면에 피장자의 신원만 기록되어 있다. 복두공복을 입은 문인석은 입과 손을 비교적 작게 표현하였으며, 망주석은 상단두의 원수(圓首)를 높게 세운 점 등이 양식적인 특징이다.
청주 한씨 세장지의 입구에 자리한 신도비는 전체 높이가 약 580㎝로 경기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이다. 귀복이수(龜趺螭首) 양식의 거대한 신도비는 전면에만 글씨가 있다. 귀부의 거북머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돌려진 채 조각되었는데 풍수지리의 방수(防水) 개념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되며, 등에는 귀갑문(龜甲文)을 짜임새 있게 잘 배치하였다. 이수의 앞뒤에는 쌍룡쟁주(雙龍爭珠)를, 좌우에는 단룡농주(單龍弄珠)를 조각하였다. 또한 이수 위에는 별도의 석물을 조각하여 하엽보주(荷葉寶珠)를 올려 놓았는데, 그 아래에는 구름 속에서 용이 노니는 모습을 장식하였다.
한백겸의 신도비는 전체적으로 고려시대의 이수 제작 기법이 관찰되며, 이웃의 고달사 원종대사탑비,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거둔사 원공국사승묘탑비와 비교된다. 인조 21년(1643) 2월에 세워진 신도비는 승정원 좌승지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이 전(篆)을 하였고, 이조판서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지은 비문을 당대의 명필인 한성부 좌윤 오준(吳竣, 1587~1666)이 썼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 묘제 석조 미술下-조선후기』
『여주의 능묘와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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