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진장묘역(閔鎭長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9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부구리 산8-4번지이다.
민진장(閔鎭長, 1649~1700)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20세에 진사가 된뒤 숙종 12년(1686)에 별시문과에 장원하였다. 할아버지 원훈과 아버지에 이어 3대가 계속 장원하여 삼세문장(三世文壯)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종참판, 승정원 도승지를 거쳐 숙종 22년(1696)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700년 의정부우의정에 오르면서 중요 요직을 맡았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의 묘는 부구리 동편 마을의 뒷산에 자리 잡고 있다. 민진장 묘의 좌측 구릉에는 호조정랑(戶曹正郞) 민재수(閔在洙, 1668~1718),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민계수(閔啓洙, 1671~1720)의 묘소도 위치하고 있어 이 일대가 여흥 민씨의 세장지임을 알 수 있다.
봉분은 단분으로 정경부인 의령남씨와의 합장묘이다. 석물로는 묘비 1기, 상석,향로석,혼유석 각 1기, 문인석 1쌍 및 계체석 등이 있다. 팔각의 호석(護石)을 두른 봉분 좌측에는 묘표가 세워져 있다. 음기의 지은이는 마모되어 파악할 수 없지만,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 1675~1736)이 써서 1734년(영조 10)에 세운 것이다.
망주석은 높이 198㎝의 규모로 좌측은 내려가고, 우측은 올라가는 형태의 쥐모양이 생동감있게 양각되어 있다. 문인석의 형태는 양관조복에 홀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양관은 3량관으로 무(武)에는 여의운문을 장식하였다. 조복의 앞자락에는 여의운문의 전형인 원형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꽃문양이 있는 대(帶)와 여의운문이 양각되어 있는 후수(後綬)와 패옥(佩玉)을 묘사하였다.
묘역 아래 있는 신도비는 총 높이 약 426㎝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여 보는 이를 압도하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팔작지붕의 옥개석 위에 두 마리의 이룡(螭龍)이 몸이 뒤엉켜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얹은 것이 특징적이다. 더욱이 기대의 전면에는 연꽃들 속에서 물결을 헤엄치는 현무(玄武)가 목을 뒤틀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형상을 양각하여 놓았다. 그리고 기대의 좌우 측면에는 앉아 있는 1마리의 해태를 양각하였고, 기대의 후면에는 연화당초문을 양각하여 놓았다. 조각 수법이 사실적이고 양식이 매우 뛰어나 영조대를 대표할 만한 신도비로 판단되며, 특히 비석 받침에 조각된 문양들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어, 조선시대 석조미술사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비문은 대학자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가 짓고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명필인 우산(盂山) 홍봉조(洪鳳祚, 1680~1760)가 썼으며 종제(從弟)되는 민진원이 전액을 올렸다. 전액이란 비신의 제일 윗부분에다 누구의 신도비라고 제목만 큰 전서(篆書)로 간략히 쓴 것을 말한다. 전액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증시문충(贈諡文孝) 민공신도비명(閔公神道碑銘)’이라 되어 있어 민진장신도비임을 알 수 있으며,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백십육년(百十六年) 계해(癸亥, 1743, 영조 19) 오월(五月) 일(日)’이다.
민진장의 묘는 왕실의 지친(至親)이 아니면 마련할 수 없는 호석이 설치되어 있어, 당시 민진장 일문(一門)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다. 석물 또한 당대의 명장(名匠)들이 참여한 듯,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호석을 제외하곤, 숙종대 사대부 묘제의 전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묘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여주시청 / 여주문화원)
『여주군의 문화유적 지도-지정문화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