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선생생가(李恒老先生生家)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화서1로 239(노문리 535-6번지)이다.
이 집은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인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선생이 살 던 곳이다. 선생의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그는 순조(純祖) 8년(1808) 반시(泮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헌종(憲宗) 6년(1840) 휘경원참봉(徽慶園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그 뒤에도 지방 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사양하고 향리(鄕里)에서 강학을 위하여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 : 1833~1906), 김평묵(金平默 : 1819~1888), 유중교(柳重敎 : 1821~1893) 등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종(高宗) 원년(1864) 당시의 권력자 조두순(趙斗淳 : 1796~1870)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 전라도사(全羅道都事) · 지평(持平) · 장령(掌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동부승지(同副承旨)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대원군(大院君 : 1820~1898)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그 뒤 공조참판(工曹參議)으로 승진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병인상소(丙寅上訴)와 만동묘(萬東廟)의 재건 상소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 당한 뒤 낙향하였다.
그는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 가는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재건한 조선 말기 주리철학 3대가의 한 사람으로 그의 심전주리론(心專主理論)은 조선 말기의 민족 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 운동의 실천적 지도 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華西集)』, 『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벽계아언(碧溪雅言)』 12권 등이 있다.
선생의 생가가 있는 벽계마을은 벽진 이씨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항로선생의 조상이 이 마을로 입향하게 된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항로 선생의 고조부가 이조 참판을 지내면서 그 이전에 살았던 지금의 일산과 파주의 경계지 근처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항로 생가의 건립연대는 안채의 경우 대략 300년 이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와 가옥 아래에 지어진 강당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이 곳은 선생이 탄생하여 일생을 보낸 곳으로서 양헌수(梁憲洙, 1826~1888), 최익현(崔益鉉, 1833~1906), 김평묵(金平默, 1819~1888), 유중교(柳重敎, 1821~1893), 유인석(柳麟錫, 1842~1915), 홍재학(洪在鶴, 1848~1881) 등 많은 선비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던 곳이기도 하다.
건물은 사랑채, 행랑채, 안채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공간 구성을 따르고 있다. 가옥의 배치는 현재 역‘ㄱ’자형의 안채와 역‘ㄷ’자형의 사랑채가 가운데 담장을 두고 가로로 긴 ‘ㅁ’자 형태를 가진다. 안채의 경우 경기지방의 전형적인 평면에 건넌방인 청화정사와 마루방사이에 부엌을 두고 있어 덧달아낸 형식으로 추측된다. 안방과 웃방의 바깥쪽 뒤란에 툇마루가 있고, 또 대청의 안쪽과 건넌방인 청화정사 전면에도 툇마루가 이어져 있다. 안방의 안쪽과 대청의 뒤편은 쪽마루가 있는데, 이처럼 툇마루와 쪽마루가 많이 나있는 것은 내부 공간과 외부공간의 완충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채는 평사량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기단과 주초는 자연석으로 덤벙주초이다. 대청의 중앙부 가구는 고주와 후면 평주에 대량을 걸었고, 낮은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있다. 툇칸은 툇보를 사용하지 않고 처마서까래만 고주와 툇기둥에 걸어놓았다. 사각의 툇기둥 상부는 목침 크기의 보아지와 처마도리가 사괘맞춤으로 결구되어 있다.
사랑채는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 새롭게 지었는데, 예전의 모습을 고증하고 故 장기덕옹(1920년생)의 증언을 참고하여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가옥의 부엌쪽 뒤란에는 삼량가구의 4칸 규모로 된 초가 한 채가 있으며, 그 뒤쪽에는 우물이 아직 남아 있다. 가옥과는 별도로 아래쪽에 지어진 벽계강당은 사랑채를 짓고 난 후에 건립되었다. 강당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며 장대석 기단위에 잘 다듬은 원형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익공계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자료출처 : 양평문화원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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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양평군청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조선말기 성리학자.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시호는 문경(文敬), 초명은 광로(光老), 본관은 벽진(碧珍: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 이회장(李晦章)의 아들이다. 1792년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 출신이다. 3세에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으며 12세에는 상서를 익혔다. 1808년(순조 8) 한성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불정이 있음을 보고 이를 단념, 오로지 학문에만 전심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화서는 14, 5세 때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마에 주력할 계획을 했었다. 16세에 화서는 부친 우록헌이 글을 배우던 임종주(1734-?)의 아들 영서 임노(1755-1828)를 만나보았다. 또 21세에는 지평에 가서 죽촌 이우신(1762-1822)을 만나보았다.
1813년(22세)에 학문을 스승에게서 이어받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화서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 쌍계사와 고달사 등 절간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 ‘위기’ 공부에 전념하였다. 공부함에 있어서 화서는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주자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화서는 『朱子大全(주자대전)』을 읽고서는 그 학문이 진실로 주자 이후의 正宗임을 깨닫고 주자 다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화서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주자를 종주하지 않으면 공자의 문정에 들어갈 수 없고 송자를 헌장하지 않으면 주자의 계통에 접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화서는 매일 동틀 무렵에 일어나자마자 꿇어앉아 『詩經(시경)』의 억시와 주자의 「경재잠」을 외우고 난 후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참배하였다. 이 「경재잠」도 「백록동학규」와 마찬가지로 화서의 인격형성과 생활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나아가 그 학파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서의 학문은 성과 경을 수양의 근본으로 하였고,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서는 主敬(주경)하는 공부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천만가지 善(선)도 이에 따라 생겨나고 천만가지 악도 이에 따라 소멸된다고 하였다.
1824년 33세에는 가평에 있는 조종암을 답사하고, 계획한 바 있었으나 실현하지 못했는데, 존화양이의 취지로 ‘見心亭(견심정)’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면암 최익현은 「華西李先生神道碑銘(화서이선생신도비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소학』과 『주자가례』로 근본을 삼고, 『대학』 『논어』『맹자』『중용』으로 주를 삼았다. 그런 다음 경사에 미쳐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으며, 주자를 공자 후의 일인자라고 여겨 경서의 주석을 위시하여 『朱子大全(주자대전)』, 『朱子語類(주자어류)』에 이르기까지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고 공경하기를 神明(신명)과 같이 하였다.
이어 『宋子大全(송자대전)』을 읽었는데, 정주의 전체와 춘추의 대용이 이 책에 있음을 보고는 시조리와 종조리가 참으로 주자 이후의 정종이라고 생각하여, 그 존숭하고 심복하기를 주자 다음으로 하였으니, 그 문로의 정대함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知行(지행) 공부가 敬(경)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비록 시대는 주자·송자와 다르지만 사실은 서로 부합하는 것이다.”
화서는 「閭塾講規(여숙강규)」를 만들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화서의 여숙강규 중에서 강계 9조목은 화서의 교육철학이 담겨져 있는데, 그 첫째와 여덟 번째 조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릇 같이 강학하는 사람들은 인원수만 채워 입으로 읽기만 일삼지 말고 반드시 내 몸에 돌이켜서 체험할 것을 생각하여 마음으로는 그 묘리를 깨닫고 몸으로는 그 실천에 힘쓸 것.
이 조목은 서론으로 요지는 강학자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배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서는 知行竝進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선말기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화서학파들의 현실참여는 이런 화서의 실천교육의 영향에서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⑧ 북쪽 오랑캐들(청국인)은 의관을 부숴 없애고 서쪽 귀신들은(서양인) 心術을 좀먹고 있으니, 마땅히 몸을 꼿꼿이 하고 다리를 세우며 마음을 밝히고 눈을 부릅떠 성현들의 가르침과 父祖의 유업을 추락시키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선비된 사람의 철두철미한 법문인 것이다.
『문화재 안내문안집. 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양평의 지명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