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사지(蘆山祠址)는 경기도 기념물 제4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산69-7번지이다.
노산사는 조선 말기 성리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선생의 높은 학행을 기리기 위하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조선 말기에 건립되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54년 유림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주자(朱子)를 주향으로 하고 동쪽에는 송시열(宋時烈)을, 서쪽에는 이항로(李恒老)를 제향하였다. 제향인물인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이회장(李晦章)과 전의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서종면 벽계(蘗溪)에서 태어났다. 화서(華西)라는 호는 그가 살던 벽계마을이 청화산(靑華山) 서쪽 10여 리에 위치한 관계로 문하들이 『화서선생(華西先生)』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순조 8년(1808)에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에 있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 친분 맺기를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후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 뒤 그의 학덕이 알려져 헌종 6년(1840) 휘경원(徽慶園)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하여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ㆍ김평묵(金平黙)ㆍ유중교(柳重敎)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칠십이 넘은 노령으로 입궐하여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으며, 이어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경복궁 증축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한 병인상소로 인해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 당한 뒤 낙향하였다.
그는 성리학자일 뿐 아니라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염려한 우국지사로서 그의 문하에서 위정척사 운동의 중심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문집으로는 『화서집(華西集)』이 있다. 묘는 서종면 정배리 퉁점골에 있다가 노문리 벽계마을로 이장하였다.
현재의 노산사는 경내 264㎡ 규모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전면에 제월대라고 새긴 자연석과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자료출처 : 양평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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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양평군청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조선말기 성리학자.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시호는 문경(文敬), 초명은 광로(光老), 본관은 벽진(碧珍: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이회장(李晦章)의 아들이다. 1792년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 출신이다. 3세에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으며 12세에는 상서를 익혔다. 1808년(순조 8) 한성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불정이 있음을 보고 이를 단념, 오로지 학문에만 전심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화서는 14, 5세 때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마에 주력할 계획을 했었다. 16세에 화서는 부친 우록헌이 글을 배우던 임종주(1734-?)의 아들 영서 임노(1755-1828)를 만나보았다. 또 21세에는 지평에 가서 죽촌 이우신(1762-1822)을 만나보았다. 1813년(22세)에 학문을 스승에게서 이어받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화서는 번잡한 세상을 떠나 쌍계사와 고달사 등 절간이나 조용한 곳을 찾아 ‘위기’ 공부에 전념하였다. 공부함에 있어서 화서는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주자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화서는 『朱子大全(주자대전)』을 읽고서는 그 학문이 진실로 주자 이후의 정종(正宗)임을 깨닫고 주자 다음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화서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주자를 종주하지 않으면 공자의 문정에 들어갈 수 없고 송자를 헌장하지 않으면 주자의 계통에 접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화서는 매일 동틀 무렵에 일어나자마자 꿇어앉아 『詩經(시경)』의 억시와 주자의 「경재잠」을 외우고 난 후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참배하였다. 이 「경재잠」도 「백록동학규」와 마찬가지로 화서의 인격형성과 생활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나아가 그 학파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서의 학문은 성과 경을 수양의 근본으로 하였고, 사소한 일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화서는 主敬(주경)하는 공부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천만가지 善(선)도 이에 따라 생겨나고 천만가지 악도 이에 따라 소멸된다고 하였다. 1824년 33세에는 가평에 있는 조종암을 답사하고, 계획한 바 있었으나 실현하지 못했는데, 존화양이의 취지로 ‘見心亭(견심정)’을 세우려고 하였던 것이다.
면암 최익현은 「華西李先生神道碑銘(화서이선생신도비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소학』과 『주자가례』로 근본을 삼고, 『대학』 『논어』『맹자』『중용』으로 주를 삼았다. 그런 다음 경사에 미쳐 차근차근 순서가 있었으며, 주자를 공자 후의 일인자라고 여겨 경서의 주석을 위시하여 『朱子大全(주자대전)』, 『朱子語類(주자어류)』에 이르기까지 사랑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고 공경하기를 神明(신명)과 같이 하였다.
이어 『宋子大全(송자대전)』을 읽었는데, 정주의 전체와 춘추의 대용이 이 책에 있음을 보고는 시조리와 종조리가 참으로 주자 이후의 정종이라고 생각하여, 그 존숭하고 심복하기를 주자 다음으로 하였으니, 그 문로의 정대함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선생의 知行(지행) 공부가 敬(경)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비록 시대는 주자·송자와 다르지만 사실은 서로 부합하는 것이다.”
화서는 「閭塾講規(여숙강규)」를 만들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화서의 여숙강규 중에서 강계 9조목은 화서의 교육철학이 담겨져 있는데, 그 첫째와 여덟 번째 조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릇 같이 강학하는 사람들은 인원수만 채워 입으로 읽기만 일삼지 말고 반드시 내 몸에 돌이켜서 체험할 것을 생각하여 마음으로는 그 묘리를 깨닫고 몸으로는 그 실천에 힘쓸 것.
이 조목은 서론으로 요지는 강학자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배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서는 知行竝進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선말기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화서학파들의 현실참여는 이런 화서의 실천교육의 영향에서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⑧ 북쪽 오랑캐들(청국인)은 의관을 부숴 없애고 서쪽 귀신들은(서양인) 心術을 좀먹고 있으니, 마땅히 몸을 꼿꼿이 하고 다리를 세우며 마음을 밝히고 눈을 부릅떠 성현들의 가르침과 父祖의 유업을 추락시키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선비된 사람의 철두철미한 법문인 것이다.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