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신복리강맹경묘역(楊平新福里姜孟卿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5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산301번지이다.
조선 세종(世宗)~세조(世祖) 연간의 문신인 강맹경(1410~1461)을 모신 유택이다. 그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장(子章), 본관은 진주이다. 지창령현사(知昌寧縣事) 강우덕(姜友德)의 아들로 세종 11년(1429)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이조정랑,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 등을 지냈다. 문종 1년(1451)에는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단종 때에는 이조참판과 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역임하였다. 1445년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수양대군을 도운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오르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세조 2년(1456) 좌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조 4년(1458)에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묘역은 상하 2단의 계체석(階砌石)을 두어 상계(上階)에 봉분·묘역·상석을 두고 중계(中階)의 중앙에 장명등, 좌우에 문인석을 배열하였다. 이 석물들은 고려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조각양식이다. 우측 문인석 바로 뒤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최근에 팔작지붕형 비각(碑閣)을 설치하였다. 묘비는 화관석(花冠石)·비신(碑身)·기대(基臺)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하나의 화강암으로 제작되었고,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신도비는 화관석·비신·기대에 전체를 받치는 대좌(臺座)로 구성되어 있고, 비문은 신숙주(申叔舟, 1417~1464)가 찬(撰)하고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써서 세조 8년(1462)에 건립한 것이다. 한편, 그의 묘역 바로 위쪽에는 부모인 강우덕(姜友德)과 재령이씨(載寧李氏)의 합장묘로 추정되는 묘역이 위치한다. 이 묘역에는 상석 2기. 장명등, 문인석 1쌍 등의 석물이 있다.
(자료출처 : 양평문화원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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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강맹경(姜孟卿)
생몰연대 : 1410(태종 10)∼1461(세조 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장(子章). 문하찬성사 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회백(淮伯)이고, 아버지는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 우덕(友德)이며, 어머니는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蕙)의 딸이다.
1426년(세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29년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인·지승문원사·집의를 지냈다. 1451년(문종 1)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이조참판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을 도왔고, 뒤이어 예문관제학·의정부우참찬을 역임하였다.
1455년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 : 선양으로 받음)하는 일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정되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6년(세조 2) 좌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8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신숙주(申叔舟)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