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김사형묘역(翼元公金士衡墓域)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 49번지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조선의 개국과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을 세운 김사형(金士衡 : 1333~1407)을 모신 유택이다. 김사형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이다.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천(蕆)의 아들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조선 개국 공신으로 공신 1등에 책록되고, 문하시중에 제수되었으며 상락백(上洛伯)의 작위를 받았다. 태조 5년(1396)에는 좌정승으로 오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토벌하러 갔다가 이듬해 환도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에는 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년)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401년에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진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묘역의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죽산박씨(竹山朴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은 화강암의 장대석을 이용하여 3단의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한 변의 길이가 약 170cm인 정육면체로 조성되어 있다. 계체석은 상하 2단으로 배열하여 계절(階節)과 배계절(拜階節)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있다. 묘역의 석물로는 묘비 1기, 상석 · 향로석 각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1쌍이 있고, 묘역으로부터 약 600m 가량 떨어진 마을입구에 비각 안에 안치된 신도비 1기가 있다.
봉분 좌측의 묘비는 옥개석(屋蓋石) · 비신(碑身) · 기대(基臺)로 구성되었다. 이 묘비는 원래의 비를 분실하여 1936년에 변영인(卞榮寅)이 찬하고 김명회(金命會)가 글을 써서 건립한 것이다.
봉분 앞의 상석은 최근에 신설된 것이며, 봉분 뒤편으로 원래의 상석으로 판단되는 석물이 산신제를 위한 상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묘역 중앙의 장명등은 사모의 옥개석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고, 화창(火窓)이 앞뒤로 크게 뚫려 있고 좌우 측면은 막혀 있다. 문인석은 조선전기의 양식인 복두공복(幞頭公服)에 홀(笏)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안면에 턱수염을 묘사한 것이 특징적이다.
마을 입구의 신도비는 옥개석 · 비신 · 기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신도비는 1934년에 이우면(李愚冕)이 찬하고, 김성묵(金聖黙)이 전액을 하고 김정회(金珵會)가 글을 써서 다시 건립한 것이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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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김사형(金士衡)
생몰연대 : 1332(충혜왕 2)∼1407(태종 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이고, 할아버지는 영후(永煦)이며,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蕆)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다.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 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000호 및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1396년(태조 5)에 도통처치사(都統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그 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해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 구신이며, 가문이 귀하고 높았으며 마음이 청고해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결단하였다. 대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양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