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대모산성(楊州 大母山城)은 사적 제52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789일원이다.
양주산성은 일명 대모산성이라고도 하며, 양주시 유양동과 백석읍 방성리에 연접하여 있다. 산성은 해발 212m인 대모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으며 유양동과 백석읍의 경계를 이룬다.
대모산성은 『三國史記』, 『世宗實錄』에서 매초성(買肖城)의 기사를 근거로 매초성(買肖城)으로 비정(比定) 되기도 하며, 『新增東國輿地勝覽』, 『萬機要覽』, 『京畿誌』, 『京畿邑誌』, 『輿圖備志』, 『大東地志』등에서 양주 대모성산(大母城山), 대모산성(大母山城)의 기록이 확인된다.
산성의 동쪽은 유양동, 동남쪽은 남방동, 남쪽은 어둔동, 북쪽은 방성리, 남서쪽은 복지리이다. 이곳은 북서 방향의 유일한 통행로인 광적면 일대를 굽어볼 수 있고, 수락산 봉수대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분지형의 작은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쌓은 이 테뫼식의 석축 산성은 그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하여 오래전부터 삼국시대의 산성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현재 산성의 둘레는 약 1.4km이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북문지 좌우측과 동편 등 3개소에 약 70~80m정도의 성벽이 대체로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성벽의 높이는 4~5m이고 기저부의 척은 약 6m이다. 성내부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지가 여러 곳이 있으며, 지표에는 원형의 초석 여러 개가 노출되어 있다고 주변에는 많은 토기편과 와편이 산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 많이 보이는 축성 방법, 즉 성벽 밑 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쌓고 성벽위쪽은 점차 작은 석재를 이용하는 양식과는 달리 고식의 성벽 축조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체성을 보수하여 성벽 기초부분으로 갈수록 점차 넓어지게 하거나 시각적으로 대단히 높게 보이게 축성하였다. 이러한 축성 방법은 주로 5~6세기 중엽의 신라성에서 많이 발견되며 아차산성, 삼년산성, 명활산성 등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신라의 경우 470년에 축성된 삼년산성 이래 계속 이러한 축성기법이 사용됨을 고려할 때 현존하는 성벽은 6세기 중엽 이후의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지는 모두 10여개 소가 발견되었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할석으로 조성산 기단, 초석, 적심석의 일부만 잔존한다. 유물은 대부분 건물지 내부와 추정 저장공, 문지 주변에서 출토되었는데 무기류, 농기류, 마구류, 건물부재, 일반생활용구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건물지 하층의 풍화암반층 주변에서 반월형 석도나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해왔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러나 산 아래에 비옥한 평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산 정상부에 위치한 고지성 집락 형태는 원시사회로부터 고대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긴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경지 확보를 위한 투쟁과정에서 군사적 방위기능의 필요에 의하여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유적은 고대국가 성립의 전 단계에 있어 집단 간의 갈등과 그들의 방어시설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이 곳은 1980년부터 1998년까지 7차례 이루어진 발굴조사로 635점의 금속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최고 관리 계층이 소유할 수 있었던 청동 팔찌, 청동 도장 등은 대모산성의 위상을 보여주며, 각종 농구류, 공구류 등을 통해 대모산성을 중심으로 그 관할지의 농업·수공업 생산력이 높았고 주변지역에서 생산된 많은 농산물과 수공업품이 대모산성으로 집중·관리되어 물류 거점의 역할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에 들어 양주산성을 포함한 이 일대는 5세기 중엽까지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6세기 중엽가지 고구려에 속하였고, 6세기 중반 이후는 신라의 소유가 된 지역이다. 즉 삼국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때문에 산성 내에서 발견되는 유물이나 유구 역시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백제, 신라계의 유물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구려계의 유물은 비교적 희박하다.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의 유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어 이 산성이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관방시설로 이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이 산성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매초성인가 하는 점이다. 실상 발굴의 목적도 삼국시대 대당전투에서 결정적인 전공을 세운 곳인 매초성의 흔적을 찾고자 함이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 남아 있는 성벽은 신라에 의하여 축성되었지만 그 이전 백제시기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요충지로 이용되었음이 밝혀진 것도 이곳이 매초성지라는 견해를 뒷받침해준다고 하겠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양주시청)
『문화재 안내문안집2』
『경기문화재총람-도지징편(1~3)』
『경기도의 성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