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선생묘(李廷龜先生墓) 경기도 기념물 제79호로 소재지는 경기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5-1이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던 월사(月沙) 이정구(1564∼1635)의 묘소이다. 선조 23년(1590)에 병과에 급제한 후 병조·예조·형조판서를 거쳐 인조 6년(1628)에는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죽은 후인 영조 21년(1754)에 특명으로 부조전(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원히 모시는 것)을 하사 받았다. 그는 문장 가문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였고 중국어에 능통하여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장은 장유·이식·신흠과 더불어 ‘한문 4대가’라고 일컬어졌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주위를 10개의 호석(護石)으로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밀집되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전방에 좌우로 동자상, 망주석, 문인석이 각 1쌍씩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묘역의 좌측 전방에는 비각 안에 3기의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어 있는데 좌측에 아들 이명한(李明漢 : 1595~1645), 우측에 손자 이일상(李一相 : 1612~1666)의 신도비가 함께 안치되어 있다. 신도비 비문은 김상헌(金尙憲 : 1570~1652)이 글을 짓고, 이경석(李景奭 : 1595~1671)이 글을 썼으며, 김상용(金尙容 : 1561~1637)이 전액(篆額)을 써서 효종(孝宗) 7년(1656)에 건립하였다.
묘역의 배치를 보면 월사 선생의 묘소가 제일 앞에 있으며 위로 인조 때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장손 이일상(李一相)의 묘가 있으며, 그 위로 예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장자 이명한(李明漢)의 묘가 있다. 후손의 묘가 위에 있는 것은 순서대로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올 묘 자리라 하여 반대(易葬)로 묘를 썼다고 전해오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가평군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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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가평군청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이정귀(李廷龜)의 자는 성징(聖徵)이고 월사(月沙)는 그의 호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그는 이조 명종 19년 갑자(서기 1564년) 10월 8일에 서울 청파동에서 출생하여 8개월만에 능히 걸었고, 또한 말과 글자를 읽었다고 한다.
6세 되던 해 봄에 문밖에 나갔다가 마침 버드나무 강아지꽃이 만개하고 피리소리가 들려오며, 취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가는 것을 보고, 시를 지었으니 扶過小橋外, 楊花爭亂飛何處數聲笛, 吹來醒醉耳라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다 신동이라고 하였다.
9세때 당시(唐詩)와 한시(漢詩)를 읽고, 10세에 소학 및 사서를 읽었으며, 11세때에 이미칠언시를 지었다. 14세때에 초시에 합격했고, 18세에 안동권씨 부인과 혼인한 후 도봉서원·영국서원·삼각산 중흥사 등지에서 견문을 넓히는 글을 배웠다.
21세 22세에 걸쳐 각각 진사시험에 합격했고, 27세인 선조 23년 경인(1590년)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과 한림원에 입사(入仕)하였다.
이듬해인 선조 25년에 임진란이 일어나 임금이 급보를 전해듣고, 군신(群臣)을 모은 자리에서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어 일을 기록함에 운필(運筆)의 동작이 물 흐르듯 아름다워 임금이 매우 기이(奇異)하게 여기어 칭찬해 준 기록으로 보아 글씨에 능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30세되던 선조 26년에 명나라 경략 송응창이 조선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나라 조정에 대하여 도학경의(道學經義)를 토론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을 정림하자는 요청이 있었는데 이때 강사의 임명을 받고 대응하니 명나라 사신이 그의 박학을 대하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33세에 예조정랑이 되고, 34세에 병조정랑·승문원교리겸 한학교수가 되었다. 이때에 이미 중국어에 능통하여 임금의 통역을 맡았다. 35세에 통정대부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 해에 명나라 정응태가 우리나라에 파견한 장수와 간격이 생기여 우리나라에까지 혐오심을 품고, 명나라 황제에게 참소하기를 “조선이 일본에게 길을 빌려 주어 명나라 침공을 내통하고, 왕실에대한 황제국 칭호까지 모의한다”고 여러가지의 죄목을 밝혀 일러 바쳤는데, 이때 명나라 궁궐에서 크게 분노하여 조선을 침공해야 한다는 논란이 크게 일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辨誣奏(변명상소문) 작성을 이정귀에게 시켜 오성 이항복과 더불어 연경에 가서 주문을 전달했는데 명나라의 모든 재상이 읽어보고 예의바른 나라의 간곡한 주문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는 이까지 었었다고 하며, 일개 신하의 망동으로 커다란 과오를 범할뻔 했다고 하고, 즉시 정응태에게는 응분의 벌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인사들이 저마다 주문을 복사하여 소장하게 되니 중국의 한식종이(漢紙) 값이 올라갔었다고 전해진다.
37세에 호조판서에 증진되었으나 자인왕후가 승하하니 예조판서로 자리를 옮겨 국장도감제조가 되어 장례를 전담하였다. 38세에 홍문관·예문관 대제학과 지성균관사가 되어 대성전 상량문을 지었는데 그때 왕이 쓰고 계시던 貂帽(소모)를 즉석에서 벗어 하사하니 죽는날까지 쓰고 다녔다고 한다.
41세에는 세자책봉 주청사로 연경에 가고, 42세(선조 38년 을사)에는 서강 현석리에 조그만 정자를 세우고 보만정이라 이름 지었다. 이 해에 경기감사가 되었다. 43세에 명륜당 상량문을 짓고, 44세에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45세에 선조대왕이 승하하여 또다시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국장을 지휘하였다.
46세에 예조판서와 대제학에 중임되었고, 48세에 동의보감 서문을 지었으며, 이조판서를 사임하고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52세에 형조판서가 되고, 다시 호조판서에 삼임(三任)되다. 54세에 명나라에 갔을때 판중추를 배하다.
57세에 다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마침 명나라 신종황제가 붕어하였다. 그때 그곳 문인학사들이 월사의 사고(私稿)를 간청하므로 기행문식으로 적은 시 100여수를 조천록이라 이름하여 왕휘에게 주니 스스로 서문을 붙여 간행까지 하였다. 60세인 인조원년 계해에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선생은 예조판서를 6차로 임명되었으며 대비가 광해를 베이려 하는 것을 극력 만류해 중지케 하였다.
62세에 좌찬성이 되었고, 63세에 판중추부사와 예조 판서를 겸했다. 64세에 북쪽 오랑캐가 침공하여 의주를 함락하니 다시 호조판서를 겸임하여 빈접사(賓接使)로 임명받고, 화평의 길을 모색한 결과 적들이 즉시 철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 조정은 물론이요, 명나라에서까지 국난을 모면한 방덕(方德)과 수완을 크게 절찬하였다.
65세인 인조 6년에 우의정이 되고, 69세에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공은 인조 13년인 서기 1635년 4월 29일 향년 7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임금이 소식을 듣고 조회 마저 폐하고, 3일간이나 고기와 육식을 먹지 않으시고 애통해 하며, 신하를 보내 사제(賜祭)하였으며, 세자도 곡을 하며 7일간이나 어육을 삼가고 친히 빈소에 나와 치제(致祭)하였다. 장례일에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려 받고, 처음 경기도 용인에 장사 지냈다가 4년후에 가평에 이장하였다.
이듬해 충남 공주에서 문인 최유해가 公의 전집을 간행하고, 숙종 14년에 다시 대구에서 원집을 중간했으며, 숙종 46년에 증손 희조가 별집을 추가로 간행하였다.
끝으로 정조 18년 갑인년인 서기 1794년에 정조대왕이 신하를 보내 치제한 제문을 싣는다. “말을 아는 어린이면 다 월사(月沙)를 알 것이니 덕망이 동국에 가득하고 명성이 중국에 떨치도다. 현인군자의 뒤가 크게 빛낼 것이니 二子八孫이 천억으로 퍼지리로다. 내외 손자들이 첫·둘째에 꼽히니 한랑없이 축복이 나오는 근원이 있도다. 克似한 어진 尉(註:永安尉 즉 월사의 외손이며, 정조대왕의 외선조임)에서 자궁(慈宮)이 탄생하시니 왕가에 은혜하여 세세무궁하도다. 동경지세에 보본지총으로 이미 文敬公에 제사하니 어찌 文忠公에 뒤할손가? 송각지측에 정승의 사당이 있으니 어떻게 왕실을 도우리까. 번성함을 이어 주소서.”
월사의 묘앞에는 연안이씨 삼세비각이 있는데 가운데 신도비가 월사의 것으로 1656년(효종 8년)에 세웠고, 이 비문은 의정부 좌의정이던 김상헌선생이 짓고, 전서도 썼으며 본문은 의정부 영의정 이경석이 썼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