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남장군묘(李德南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2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 산85번지이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의병장으로 전사한 이덕남(?~1592) 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쌍분이며 부인과의 합장묘이다. 묘비 이외에는 일체의 석물이 없었으나, 1975년에 후손들이 상석 · 혼유석 · 무인석 1쌍 · 오석제(烏石製) 묘비를 다시 세우고, 원래의 묘비는 묘역 약 80m 앞쪽으로 옮겼다. 이전의 묘비는 팔작지붕형 가첨석에 비신(碑身)은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은 구조이며, 비문은 영조대(英祖代) 학자인 윤봉구(尹鳳九 : 1681~1767)가 지었고 홍봉조(洪鳳祚 : 1680~1760)의 글을 김진상(金鎭商 : 1684~1755)이 새긴 것이다.
이덕남은 20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으로 있다가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이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외삼촌인 홍자수(洪自修 : ?~1592)와 함께 고향 안성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농기구를 녹여 만든 무기로 북진하는 왜적을 수차에 걸쳐 격퇴하였다. 안성과 진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서운산 정상에 토성을 구축하여 의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싸울 때 홍계남(洪季男 : 1564∼1597) 장군이 성의 좌측을, 이덕남 장군이 성의 우측을 맡아 적을 협공하였다. 그 뒤 기호 · 호서 지방의 의병과 합세하여 활약하다가 전사하였다. 후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肅宗) 44년(1718)에는 장군의 생가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이 정문은 묘역에서 약 1km 떨어진 서운면 신촌리에 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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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안성시청
이덕남(李德南, ?∼1592)
의병장으로 본관은 영천,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한 후 외삼촌 홍자수에게서 자랐다. 무예에 뛰어나 약관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훈련원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선조가 어명을 내려 무신 당하관 중 장차 큰 인물이 될 장재를 천거하라 하자 유성룡(柳成龍)이 이순신과 함께 그를 천거했다. 그리하여 어모장군(御侮將軍) 훈련원정으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당시에 그는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난의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달려가 임금을 호종하려 했으나 이미 의주로 피난가고 없었다. 그는 안성으로 돌아와 외삼촌 홍자수, 외사촌 동생인 홍계남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고 농기구를 녹여 무기를 만들며 군사를 훈련시켰다.
일본군이 진천의 엽둔고개를 넘어 안성으로 진군한다는 첩보를 접한 그는 후방을 홍계남에게 맡기고 선발대 30여명을 인솔하여 청룡리의 동구 밖에서 왜적 1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를 본 왜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반면 주위의 청·장년들은 구름같이 의병진에 투신하여 삽시간에 3,0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는 의병의 대오와 부서를 정하고 안성 남쪽 10리 지점에 진을 치고 참호를 파고 토성을 쌓아 방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에 죽산, 용인, 양지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은 감히 북상을 시도하지 못했다. 왜적이 죽산부로 결집을 시도하자 죽산의 좌찬령(佐贊嶺)으로 달려가 연전연승으로 이를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홍계남이 중상을 입고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출하였다.
이어 기호, 호서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적들의 연합군에 의해 외삼촌 홍자수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