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보고가(李天輔古家)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연하리 226번지이다.
이 가옥은 조선 영조(英祖) 때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1698~1761)가 살았던 집이다. 이천보는 본관(本貫)이 연안(延安)이고 자는 의숙(宜叔), 호는 진암(晉庵)이며 문인으로 이름이 높던 인물이다. 42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소탈한 성격에 시와 문장이 뛰어났다.
이 집은 이천보가 지내던 곳이라고 하나 그 당시의 건물은 모두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고종(高宗) 4년(1867)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안채는 불에 타버리고 지금은 사랑채와 행랑이 남아 있다. 사랑채는 一자형으로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평면을 가지며 동향하여 있다. 잘 다듬어 쌓은 장대석(長臺石)의 이벌대 기단 위에 높이가 한 자 가량 되는 사다리꼴 초석(礎石)을 놓았는데 이 기단과 초석은 이천보 생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위에 세운 목조 건물은 고종 때의 것인데 비교적 치목을 정교히 하고 공간 구성도 짜임새 있게 되어 있다. 평면은 제일 왼쪽으로 하부에 궁판을 둔 2칸의 누마루를 두고 그 우측으로 전면에 반칸의 퇴칸을 두고 방 · 대청 · 방의 순으로 연이어지며, 제일 우측 1칸은 부엌을 두었다. 이러한 사랑채의 평면 구성은 경기 지방의 주택에서는 흔하지 않은 예라 할 수 있다. 가구 구조(架構構造)는 일고주오량(一高柱五樑)으로 짜여 있고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누마루 쪽은 팔작지붕이고 부엌 쪽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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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가평군청
이천보(李天輔, 1698∼1761)
이천보(李天輔)의 자는 의숙(宜叔)이요, 호는 진암이며, 본관은 연안으로 1698년 (숙종 25년 무인)에 이주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풍채가 의연해 보였으며, 총명했다고 하나 그는 큰 뜻만을 품은 채 글읽기를 싫어했고, 동네 아이들과 같이 소(牛)를 타고 놀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암은 나이 들면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고, 그 결과 생원시험에 합격하여 내시를 가르치는 내시교관(內恃敎官)이 되면서부터 학문에 몰두하여 여러번이나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42세되던해(영조16年 기미 서기 1739년)에 비로서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정자,교리,헌납,장령등의 벼슬을 거치다가 1749년(영조 25년)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후 이조와 병조판서를 거쳐 1752년에는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가 1754년(영조 30년)에 일팔지하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여 사색당쟁이 판을 치던 시기였고, 노론인 김상로와 홍계회 등이 자신들을 미워하는 세자(世子:장차 임금이 될 동궁)의 의중을 알게 되면서 부터 온갖 음모를 꾸며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세자가 영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시녀 문씨와 화애옹주가 거처하고 있는 서궁으로 자주 들리도록 만들어 놓고, 영조의 분노를 사도록 계략을 꾸민 결과 대궐안이 온통 영조 와 세자를 둘러싸고 모함과 이간질로 가득 쌓였을 때인지라 진암 이천보도 이러한 와중에서 영의정의 자리를 떠나 판중추부사 그리고 영론령부사 또다시 영의정이 되는등 파란 곡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장헌세자의 평양원유(平壤遠遊) 사건이 일어났고, 진암은 영의정에 있으면서도 이를 수습치 못해 끝내 극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솔직 담백하면서도 부귀영화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 관계로 임금 앞에서도 直諫(직간)함을 자주하여 어전에서 여러번이나 관직을 박탈당했지만 그때마다 불과 몇일만에 복직되기도 하였다. 검은 소를 자주 타고 다녔다하여 까막소 대감이란 별명도 얻었고, 반계동계곡에서 삿갓을 쓰고 낚시질을 하며 세월을 탄식하던 진암의 모습에서 청빈한 선비의 정신을 느끼게도 한다.
이천보의 무덤은 본시 경기도 부천에 있었으나 1975년 진암이 태어난 생가가 있는 가평군 상면 태봉리 반계동으로 이장한 것이다.
『(지도로 보는) 아름다운 경기건축』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