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서원군파묘역(全州李氏瑞原君派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1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산8-2번지이다.
서원군(瑞原君)은 조선 태종(太宗)의 제2남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둘째 아들이다. 이 묘역은 효령대군의 5대손인 이신성(李愼性 : 1552∼1596)과 그의 아들 이목(李楘 : 1572∼1646), 손자 이지항(李之恒) 세 분을 모신 유택이다. 원래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던 것을 일제 때인 1937년 조선총독부가 서원군파묘역의 땅을 강제로 매입하여 1938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으로 강제 이장(移葬)하였다. 이후 분당 지구에 대한 신도시 개발 계획상 이장이 불가피하여 1992년 현 위치로 2차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2차에 걸친 이장으로 특히, 1차 이장시에 묘역이 심하게 변모되었다.
세 분의 묘역은 현재 종렬로 배열되어 있으며,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상석(床石),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망주석(望柱石) 등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 입구에는 김상헌이 글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써서 세운 이신성의 신도비(神道碑 :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고, 그 옆에 남구만이 글을 지어 숙종 6년(1706)에 세운 이목의 신도비가 있다.
이신성 묘(李愼性 墓)
묘비 · 상석 · 향로석 · 망주석 · 문인석이 각 1쌍씩 있고 묘역 입구에 신도비가 있다. 묘비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귀부(龜趺)가 받치고 있으며 비신(碑身)과 이수(螭首)는 하나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수는 한 마리의 용이 한 발로 여의주를 움켜쥔 형상이다. 신도비는 이수 · 비신 · 귀부로 구성되어 있고,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며 그 조각 수법이 매우 생동감 있고 뛰어나다. 비문은 김상헌(金尙憲 : 1570~1647)이 전액(篆額)을 하였다.
이목 묘(李楘 墓)
묘비 · 상석 · 망주석 · 문인석이 각 1쌍씩 있고, 신도비는 묘역 입구 이신성 신도비 옆에 있다. 묘비는 이수 · 비신 · 기대로 구성되어 있고, 비문 후면에는 후손 이돈영(李敦榮 : 1801~1884)이 찬한 노량진 선영에 대한 묘역 형세 및 묘역 위치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으며 철종(哲宗) 6년(1855)에 건립된 것이다. 신도비는 팔작지붕형 가첨석(加檐石) · 비신 · 기대로 구성되어 있고, 비문은 남구만(南九萬 : 1629~1711)이 찬하여 숙종(肅宗) 32년(1706)에 건립한 것이다.
이지항 묘(李之恒 墓)
이 묘역에는 묘비 · 상석과 문인석 1쌍이 있을 뿐이다. 묘비는 화관석(花冠石) · 비신 · 기대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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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이신성(李愼誠)
생몰연대 : 1552(명종 7)∼1596(선조 29)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흠중(欽仲). 효령대군(孝寧大君)보(補)의 6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호(浩)이고, 아버지는 홍천현감 언사(彦師)이며, 어머니는 홍희숙(洪希淑)의 딸이다. 박주(朴洲)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을 연마하였다. 이 때 이조판서 이이(李珥)가 동인들의 탄핵을 받자 동료 유생들과 함께 그의 무고함을 상소하고, 탄핵의 주동자인 송응개(宋應慨)·허봉(許篈)·박근원(朴謹元) 등의 유배를 청하였다. 그 뒤 천거를 받아 정릉참봉(靖陵參奉)을 거쳐 사옹원봉사에 전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을 때, 당시 상원군수(祥原郡守)이던 동생 충성(忠誠)이 봉양하던 어머니가 전란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직하여 수소문 끝에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른 뒤 함열에 은거하였다. 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이목(李楘)
생몰연대 : 1572(선조 5)∼1646(인조 2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백(文伯), 호는 송교(松郊).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신성(愼誠)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예절을 잘 지켰으며, 13세에 어머니상을 당해서도 의식과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한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가 학문을 배우고 의리를 깨달았다.
1603년(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스승 성혼이 정인홍(鄭仁弘) 등의 무고로 관작을 추탈당한 사실에 분개해 1608년 성균관 유생 500여 인과 지방 유생들과 함께 신원(伸寃)을 소청하였다. 또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을 청금록(靑衿錄 : 성균관·향교·서원등에 비치된 유생 명부)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병조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1615년 간신들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출사해, 정언·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반정공신 이귀(李貴)를 패전의 죄로 탄핵해 목베기를 청하였다.
1626년 대사간에 승진하고, 다음 해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했으며, 그 뒤 부제학·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해, 협수사(協守使)로 성 위에 올라가 지키며, 모진 풍설에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고 화의를 적극 배척했다 한다. 환도 뒤에, 윤황(尹煌) 등이 척화한 일로 유배되자 글을 올려 자핵(自劾)하고 물러났다.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으며, 유학자 김집(金集)과 친해 모든 일을 의논해서 처리하였다. 뒤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등을 역임하고, 1643년 부제학으로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겸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로는『송교유고』가 있다.
이지항(李之恒)
생몰연대 : 1605(선조 38)∼1654(효종 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월여(月如). 언사(彦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성(愼誠)이고, 아버지는 목(楘)이며, 어머니는 황우(黃佑)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1년에는 태학 유생으로서 선조 추승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1636년에는 검열(檢閱)과 대교(待敎)를 지냈고, 1637년에는 봉교(奉敎)를 역임하였으며, 1638년에는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그 뒤 1643년에는 교리(校理)·수찬(修撰)·헌납(獻納)을 역임했고, 이듬해에는 교리·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1648년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1649년에는 대사간(大司諫)·대사성을 지냈다.
당시 집의(執義) 송준길(宋浚吉)에 의하여 권문(權門 : 권세있는 가문)에 아첨하는 부패공직자라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하였으며, 조정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붕당을 짓는다고 낙인찍혀 유배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1650년에는 통정대부 이조참의 지제교 겸 춘추관 수찬관(通政大夫吏曹參義知製敎兼春秋館修撰官)으로서 삼방(三房 : 과거를 볼 때 세 試官이 있던 곳) 당상(堂上)이 되어『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부제학(副提學)과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하면서 대동법과 관련한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그 해 간원에 의해 탐관오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특진관(特進官) 허적(許積)·동지경연(同知經筵) 조석윤(趙錫胤)·시독관(侍讀官) 홍명하(洪命夏)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경기인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