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봉업사지(安城奉業寺址)는 경기도기념물 제18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5번지 외 이다.
이 사찰은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854년(신라 문성왕 16년)에 이미 ‘화차사(華次寺)’라는 이름으로 사원이 경영되었으며 925년(고려 태조 8년)의 중창 공역에 청주 호족 능달(能達)이 관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당시 이 사찰의 사격(寺格)과 죽주의 군사 · 지리적 중요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광종 연간에는 대대적으로 중창되어 태조 진영(眞影)을 모신 왕실 원당으로서 위상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때 절이름을 ‘봉업사’라고 바꾼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이 사찰에는 다른 원찰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토지와 군사가 분급되었고 가람 규모도 대단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후 983년(성종 2년)과 984년(성종 3년)에도 사찰 건물이 중건되었다.
근래의 경지정리사업시 수습된 청동향완과 청동금고 등 유물의 명문(銘文)을 통하여 1081년(문종 35년)과 1217년(고종 4년)까지도 중창을 거듭하였을 정도로 사세가 융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왕이 죽주에 행차하여 태조 진영을 알현 하였는데 이 사실은 봉업사가 고려의 여러 사원 가운데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석탑만이 남아있다”라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이 사찰은 조선 전기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에는 안성 죽산리 오층석탑(보물 제435호)과 봉업사지 당간지주(경기도유형문화재 제95호) 등의 석조물이 남아있으며 주변은 모두 논과 밭으로 변하여 경작되고 있다. 1997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목탑지(木塔址)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건물지와 부속시설 등 유구(遺構) 28개소가 노출되었고 막새류와 명문와, 청자, 중국자기, 불상편 등의 다량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성 봉업사지는 대규모 평지가람(平地伽藍)으로 통일신라에 창건된 이후 고려시대에는 광종대에 태조 진영(眞影)을 모신 왕실 원찰(願刹)이 되어 가장 융성하였고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법등이 이어졌다. 특히 경기도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통일신라시대 목탑지와 고려 태조의 진전(眞殿)터로 추정되는 유구는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국보·보물)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
『건축유적 발굴조사 자료집-사찰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