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맹선생묘및신도비(姜希孟先生墓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8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로 59(하상동 산2번지)이다.
조선 전기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로서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 했던 강희맹(1424~1483)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단분으로 정부인(貞夫人) 안씨(安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비ㆍ상석ㆍ향로석이 밀집되어 있고, 상석 전방으로 좌우에는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 왼편 아래에 세워진 신도비의 비문은 서거정(徐居正 : 1420~1488)이 찬(撰)하였고 박증영(朴增榮 : 1464~1493)이 글과 전액(篆額)을 써서 성종(成宗) 19년(1488)에 건립한 것이다.
이 묘역의 문인석은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양식과 다른 모습이어서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문인석은 전기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공복(公服)을 입고 홀(笏)을 든 모습이며 후기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에 홀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 묘역의 문인석은 두 손을 가슴 부분에 대고 자연스럽게 맞잡은 자세이다. 머리에는 이암(耳埯)식의 모자를 썼는데 귀를 덮는 부분을 뒤로 젖히고 이를 끈으로 연결되게 묶어 끈 자락을 목 아래까지 드리웠다. 몸체는 전체적으로 앞으로 조금 기울어져 상전의 분부를 기다리는 시자(侍者)의 공손한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강희맹은 세종(世宗) 29년(1447) 18세에 별시문과(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世祖) 9년(1463)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예조·병조·이조판서(判書)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한 뒤 성종(成宗) 13년(1482)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세종실록(世宗實錄)』ㆍ『예종실록(睿宗實錄)』ㆍ『경국대전(經國大典)』ㆍ『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수많은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하여 맡은 바 일을 잘 처리했으며, 당대의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뛰어난 문장가였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 경기도, 2005)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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