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보물 제1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이다.
고려시대 말기의 승려 진각국사(眞覺國師)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부도탑비이다. 창성사지는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산41번지 일대에 있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의 기단석과 주초석이 남아있고 사방에 와편이 흩어져 있다. 이 절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고, 《범우고(梵宇攷, 1799)》에는 ‘예전에 폐했는데 지금은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 폐사되었다가 18세기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00년대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考)》에는 ‘전부 화전(火田)이 되었다. 담장 석렬이 있고 석비 1기가 있을 뿐이다.’라고 기록되어 19세기 말 이전에 완전히 폐사되었고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만이 남아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각국사의 이름은 천희(千熙), 호는 설산(雪山)이며 흥해(興海 : 경상북도 영일군 홍해면) 출신이다. 1307년 출생하고 13살에 출가하여 화엄종(華嚴宗) 반룡사(盤龍寺) 주지인 일비대사(一非大師)의 제자가 되었다. 19세에 상품선(上品禪 : 일명 ‘工夫選(공부선)’이라고도 하는데 선종에서 실시하는 시험이다)에 합격하고 김생사(金生寺), 덕천사(德泉寺), 부인사(駙仁寺), 개태사(開泰寺) 등 여러 사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하였다. 1364년에는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언제 귀국하였는지는 비문이 탈락되어 알 수 없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1366년 이전에 귀국한 것으로 보이며 원에 머문 기간은 길어야 2년 남짓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잠시 치악산에 은거하였다가 동해를 순방하고, 그 후 낙산사에 잠시 머무르다 다시 1367년 1월에 치악산으로 돌아왔다. 그해 5월 공민왕이 국사로 추대하고 인장(印章)과 법복(法服)을 헌납하였다. 1372년부터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에 머물면서 대대적인 중수를 실시하였으며, 1382년(우왕 8) 창성사에서 입적하였다. 우왕이 시호를 진각국사, 탑명을 대각원조탑이라 내리고 이색(李穡)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1386년 정월에 제자인 개태사 주지 통조대사(通照大師) 충술(沖述)이 비석을 세웠다. 글씨는 승려 혜잠(惠岑)이 썼다.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비석은 지대석 위에 직사각형의 비좌를 올렸으며, 비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다만 상면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각을 죽이고 2단의 얕은 단을 조각한 다음 그 안쪽으로 홈을 파서 비신을 꽂았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문화재안내문안집. 1』
『고려시대 금석문 탁본전 : 돌에 새겨진 고려시대 선사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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