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행궁(水原 華城行宮)은 사적 제47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이다.
화성행궁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에 위치해 있다. 1789년(정조13), 옛 수원읍 뒷산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면서 수원을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읍내 중심부에 왕이 현륭원에 전배할 때 유숙할 행궁으로 조성되었다. 현륭원을 옛 수원읍 뒷산인 화산 아래로 옮기는 결정은 1789년 7월에 이루어졌으며 3개월 만에 무덤을 옮기고 옛 읍치에 살던 주민들을 새로운 장소로 이주시키고 새 읍치에 관청과 행궁 조성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그 해 10월초에는 왕이 행궁에 재숙하면서 현륭원에 전배하였다. 새로 조성한 수원부는 서쪽의 팔달산을 주산으로 해서 동향해서 시가지를 형성하고 서울에서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남북 간선도로를 두고 팔달산 아래 관청을 배치한 모습이었다. 초기의 행궁은 수원부의 관청 건물의 일부를 활용하였다. 관청은 정전인 장남헌(壯南軒)이 동향해서 세워지고 그 남쪽에 복내당(福內堂)이 있는 단출한 것이었다. 이 밖에 북쪽에 객사를 두고 동쪽 끝에 대문인 신풍루(新豊槰)를 두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장남헌을 행궁으로 사용했다.
도시에 인구가 늘고 생활이 안정되자 수원부를 ‘화성(華城)’으로 이름을 고치고 유수부로 승격시켜 장관의 지위를 한성부와 같은 정2품으로 올렸다. 1794년(정조 18)에 왕은 새로 조성한 화성에 성곽을 쌓도록 하였으며 이 때 행궁의 대대적인 증축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듬해인 1795년(정조 19)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되는 해였는데 이때 회갑연을 화성에서 거행하기 위한 조처였다. 행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성대하게 치렀으며 이에 앞서 행궁 각 전각의 이름을 회갑연에 걸맞게 고쳤다. 즉 정당(正棠)인 장남헌은 봉수당(奉壽堂)으로 고치고 봉수당에 연접해서 건물 뒤에 모친이 연회시 거처할 수 있는 전각을 지어 장락당(長榴堂)이라고 했다. 긴 수명을 봉헌한다는 봉수나 오래도록 복락을 누린다는 ‘장락(長榴)’은 모두 회갑을 맞은 모친을 위해 지은 이름이다.
또한 왕 자신이 머물 처소로 봉수당 동남쪽에 유여택(維與檠)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한쪽에 누마루가 돌출된 사대부집 사랑채 형태의 건물이었다. 아울러 봉수당 북쪽에는 임금이 연회를 베풀고 각종 행사를 여는 낙남헌(洛南軒)을 세웠다. 이 밖에 화성과 관련한 각종 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하는 외정리소를 두고 신풍루 좌우에는 남북 군영 건물을 세웠다. 을묘년의 원행 모습은 수원능행도라는 이름으로 8폭 병풍그림이 전하는데 이 그림에는 봉수당의 진찬모습이나 낙남헌의 양로연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의 건물 구성이나 모습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나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자세히 나와 있다. 『화성성역의궤』 「도설편」의 행궁전도에 의하면 행궁 전체는 동서로 긴 장방형의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에 따로 객관인 우화관이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는 모습이다. 아래쪽 중앙의 신풍루를 들어서면 네모난 마당이 나오고 다시 서쪽 중앙에 좌선문, 중양문이 나란히 세워져 있고 각각의 문 좌우는 행각으로 가로막혀 있다. 중양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마당 안쪽에 봉수당이 놓이고 봉수당 남쪽에는 행각이 바짝 붙어서 이층 누문인 경룡관 모습이 보인다. 경룡관을 들어서면 장락당으로 통하게 되어있는데 봉수당과 장락당은 지붕이 서로 이어진 모습이다. 봉수당 북쪽은 행각이 이중으로 놓이고 그 북쪽에 낙남헌이 북쪽을 행해 세워져 있다.
낙남헌 아래는 연못이 있고 한쪽에 당간이 높이 세워져 있다. 중양문 마당에서는 남쪽으로 행각을 들어서면 유여택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으며 유여택 동쪽 넓은 마당을 지나면 외정리소가 된다. 대문인 신풍루 앞 좌우에는 남북 군영이 같은 형태로 대칭으로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그림에서 보는 행궁 전체모습은 마치 궁궐의 일곽을 보는 듯한 정연하고 잘 짜여진 구성이다. 특히 신풍루에서 봉수당까지 세 개의 문을 통과하도록 하여 궁궐과 유사한 격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남한행궁이나 북한행궁에서 볼 수 없는 점이다. 또한 전체 행궁의 규모에서도 화성행궁은 600여칸에 달하여 남한행궁이나 북한행궁의 200여 칸 규모와 월등한 차이를 보인다.
1796년(정조20) 화성 축성과 함께 행궁도 완성되었다. 행궁이 지어지자 정조는 매년 정월이나 이월에 화성에 들러 현륭원에 전배하고 행궁에서 유숙하면서 오가는 길에 백성들의 삶을 살피고 이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방책을 내렸다. 정조가 사거한 후에도 역대 왕들의 현륭원 전배가 이어져서 순조는 재위 중 10차례 이상 행궁에 유숙했으며 헌종, 철종도 각각 두 차례 행궁에 머물렀다. 마지막으로는 1870년(고종 7) 고종이 현륭원 전배 차 화성에 내려와 행궁에 유숙했다.
이후 1895년 행정개편으로 화성은 수원군으로 명칭이 바뀌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도시 위상이 크게 낮아지고 행궁의 기능도 사라졌다. 1909년 나라에서는 전국 주요도시에 빈민층을 위한 의료시설로 자혜의원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화성행궁 자리에 수원 자혜의 원이 들어섰다. 인접한 객사에는 소학교령에 따라 1896년부터 신풍공립소학교가 들어섰다.
이후 행궁은 낙남헌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이 철거되고 병원시설이 들어섰다. 광복 후에도 행궁터는 도립병원으로 사용되면서 한 동안 행궁의 면모를 완전히 잃었으며 유일하게 남은 낙남헌은 한 때 수원군청의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신풍초등학교 교정 내에 남게 되었다.
한동안 자취를 잃었던 화성행궁은 1990년에 와서 도립병원이 이전되는 것을 계기로 수원시에 의해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우선 기존에 행궁터에 자리 잡고 있던 병원이 이전되고 병원건물이 철거되었으며 제일 뒤쪽의 복내당과 봉수당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이미 병원건물을 세우면서 지하실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유구의 상당부분은 훼손되었으나 본래의 건물 기단이나 초석 일부가 노출되었다.
1995년에 시작된 발굴조사는 2001년까지 5차에 걸쳐 주로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주관하여 이루어졌다. 발굴 결과 행궁의 가장 뒤쪽 담장유구가 확실하게 확인되었으며 그 밖에 봉수당 주변행각을 비롯해서 유여택의 건물 기단부가 거의 완전하게 노출되었다. 또한 중양문에서 봉수당에 이르는 어도와 어도에 깔았던 전돌이 일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자기류가 상당수 확인되었으며 기와편이 다수 출토되었지만 행궁에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생활집기는 확인된 것이 없었다.
발굴이 진행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사라진 건물에 대한 복원이 이루어졌다. 복원에서는 주로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참고가 되었으며 20세기 초에 촬영한 행궁 전경 사진이 지상부 건물 복원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발굴에서 확인된 건물터를 통해서 복원 건물의 위치를 선정하였다. 1997년 10월 봉수당 복원을 시작으로 2002년 7월에는 행궁 중심부 전체 482칸이 복원되었다.
『화성성역의궤』나 19세기 읍지 기록에는 봉수당, 장락당, 유여택은 단청을 칠하지 않고 신풍루, 낙남헌 등은 채색이 이루어졌다고 명시되었으나 2002년 준공을 기하여 행궁의 격식을 높이고 외관을 통일하기 위해서 수원시에서 주요 건물에는 모두 단청 칠을 하였다. 2006년에는 행궁 앞의 현대식 건물을 시에서 모두 매입하여 철거하고 2008년에 광장 조성을 완료하였다. 아울러 행궁 앞으로 흐르던 개천과 개천을 가로지르던 돌다리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로서 1997년에 시작된 행궁의 복원과 주변의 정비는 거의 완료되어 행궁의 본래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수원 화성행궁은 1972년 7월 3일 경기도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6월 8일 사적 제478호로 승격되었다.
※ 화성행궁→수원 화성행궁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자료출처 : 수원시청)
『화성행궁 활용방안 연구』
『(수원) 화성행궁』
『수원의 역사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