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문정공파묘역신도비(淸州韓氏文靖公派墓域神道碑)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8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 산2-1, 264-5번지이다.
성종이 하사한 땅인 사패지(賜牌地)로서 문정공 한계희를 중심으로 한 청주한씨 문정공파의 묘역이다.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문정공 한계희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한계희(1423∼1482)는 세종 23년(1441) 진사가 되고,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기내훈구파에 속하는 유학자로서 특히 세조의 신임을 두터이 받았으며, 최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했고 1447년(성종 8) 의방유취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예종과 성종 때에는 두차례에 걸쳐 공신이 되어 그 벼슬이 우찬성에까지 올랐다. 죽은 후에는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선생의 묘 아래쪽에 자리한 비는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전기 당시의 위패 형식을 하고 있다. 받침돌은 윗면에 높직한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으며, 머릿돌은 연꽃이 엎어져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고,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솟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문화재청) 머릿돌은 폭72cm, 두께23cm, 높이52cm이고 비신이 61×18×152cm 기대가 115×59×44cm이며, 총 높이가 48cm이다. 신도비문은 그의 친구였던 서거정(1420∼1488)이 찬하고 안침이 전과 글씨를 썼다. 건립년대는 1483년(성종 14)이다.
그의 장남 한사문(1446∼150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공간이며 대사헌, 병조참판, 공조참판, 공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다. 그의 신도비는 높이 231㎝의 규모로 기대의 하부 앞뒷면에는 각 4개와 2개의 구획을 나누어 그 안에 안상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부에는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1508년(중종 3)에 세웠으며 신용개(1463∼1519)가 찬하였고 신흠(1566∼1628)이 전과 글씨를 썼다.
넷째 아들 한사개(1453∼1521)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시호는 영흥이며 영흥부사와 해주, 광주, 진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신도비 높이는 206.5㎝이고 관석의 전면에는 운문과 상단 중앙부에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도비에 해와 달이 조각된 경우는 드물며 이는 신도비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안로가 찬 하였으며 1521년(중종 16)에 건립하였다.
이 묘역은 1970년대 종중에서 단장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성남시청)
『문화재안내문안집1』
『성남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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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문정공파묘역신도비.pdf (147.6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