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은 사적 제20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진건읍 사릉로 180이다.
사릉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조선 왕조 500년의 수많은 왕후와 후궁들 중 한이 가장 많은 여인으로 여산 송씨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단종 2) 정월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리면서 의덕대비(懿德大妃)로 봉해졌다.
1456년 6월 상왕복위사건이 일어나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과 성승.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하고, 이듬해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奉)되어 영월로 유배되자 왕후도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며, 생부(生父)는 역모죄로 지방관노(地方官奴)로 영속되었다.
이후 왕후는 궁궐에서 나와 영월의 단종이 묻힌 장릉을 바라보기를 소원하여 동대문 밖(현 숭인동)에 작은 초실(草室)을 마련하여 거처하면서 소복과 소찬으로 평생을 마쳤다.
이 곳에는 왕후가 동쪽을 향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쳤다는 동망봉,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영도교, 세조가 내린 영빈전을 거부하고 초막을 짓고 살았다는 정업원터, 왕후를 동정하여 몰래 채소시장을 가장하여 채소를 파는 척하고 왕비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금남의 채소시장에 관한 유래가 전해져 내려온다.
1521년(중종 16) 왕후가 82세의 일기로 승하하자 중종(中宗)이 군부인(君夫人)의 예로 장례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왕후는 후사가 없고, 친정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을 뿐만 아니라 가산도 적몰되었기 때문에 묘자리가 없었다. 이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자신의 아들인 정미수(鄭眉壽)에게 시양(侍養)하게 하여 해주정씨 선산에 안장하였으며 위패도 정씨가에서 모시게 되었다. 177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봉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능호를 사릉이라 하고 숙종이 향사를 행하였다.
사릉은 군부인의 예로 조성되어 난간석과 무인석이 생략되었으며 복위 후 왕릉으로 승격되면서 모든 석물들을 능제에 따라 다시 조성해야 하나, 당시 가뭄과 기근으로 일부만을 이전대로 증수하여 석양과 석호 1쌍을 추가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능을 수호하는 호석과 양석은 2쌍을 배치하는 것이 예인데 장릉과 같이 추봉된 경우에는 각 1기만 배치하여 두어 차등을 두었다.또한 묘역이 능으로 정해지자 정씨집안의 묘역들을 이전시켜야 하는 문제가 생겼으나 봉릉도제조 최석정이 정릉(貞陵)의 예(例)에 따르자는 의견으로 정씨가의 분묘들을 이전하지 않게 하고, 석물들은 땅에 묻게 하였다.
남양주 사릉을 포함한 조선왕릉(왕릉 40기, 원 13기 등 총 53기)은 2009년 6월 26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료출처 : 남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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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문화재청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1. 능(陵) :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2. 원(園) :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
3. 묘(墓) :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무덤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1』
『남양주의 능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