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덕포진(金浦 德浦鎭)은 사적 제29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103-1번지이다.
고려 고종(高宗) 19년(1232) 몽골 침입으로 왕이 강화로 옮기려고 이 곳을 지날 무렵, 급류로 앞길이 막히자 왕은 흉계가 있다고 오해하여 안내를 맡은 사공 손돌(孫乭)의 처형을 명하였다. 손돌이 뱃길에 바가지를 띄우면서 그대로 따라 가라는 충언을 남기고 죽은 뒤에 야 잘못을 뉘우친 왕은 원혼을 위로하려고 손돌 사당을 짓고 그 바닷길을 ‘손돌목’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바다를 통한 서울의 길목이었던 손돌목에 덕포를 설치하여 천혜의 요새를 구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종(顯宗) 7년(1666) 강화에 속하는 진(鎭)이 되었다.
숙종(肅宗) 5년(1679) 강화의 광성보(廣城堡), 덕진진(德津鎭), 용두돈대(龍頭墩臺)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돈대와 포대(砲臺), 파수청(把守廳)이 있었다.
이 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광성보와 마주 보고 있으며, 앞이 막혀 있고 바닷길이 좁아 물살이 빠르면서 소용돌이치므로 적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 지대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때는 프랑스 함대와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때는 미군 함대와 크게 싸웠던 격전지이다. 1970년 마을 사람들이 손돌 묘 주변을 정리하면서 덕포진 포대자리를 찾게 되자, 1980년 발굴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포대 15개소와 화포 6문 그리고 건물터의 주춧돌과 화덕자리를 찾았다. 모두 청동으로 만든 화포에 명문(銘文)이 있어 포의 크기를 비롯하여 만든 곳, 만든 연대를 알 수 있었고 또한 포가 발사 준비 상태로 발견되어 포의 이동과 발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돈대와 포대 가운데 기와가 흩어진 파수청터는 대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면서 병사들을 지휘한 곳이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국가지정편1』)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대관-사적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