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조선백자 요지(廣州 朝鮮白磁 窯址)는 사적 제314호로 소재지는 경기 광주시 중부면 중부면, 광주읍, 초월면, 도척면, 실촌면, 남종면 등이다.
경기도 광주시 일대는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왕실에 상납하는 양질의 백자를 굽던 지역으로서 조선 도자기 생산의 최대 중심지이다. 사적 제314호로 관리되어 보존 가치가 양호한 85개소의 가마터 외에도 최근의 조사에 의해 광주시 일원에는 전부 290여 개소의 조선시대 가마터가 집중된 것으로 밝혀졌다. 광주에 관요(官窯)가 설치된 것은 서울과 가깝고 도한 한강과 그 지류를 이용하여 원료와 자기를 운반하기 쉽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관요가 설치된 이후 땔감을 찾아 10년마다 한 번씩 옮겨 다닌 것이 문헌 기록, 간지(干支) 등의 명문이 있는 파편 등에서 알 수 있다. 면 단위별로 지금까지 확인된 가마터는 남종면 22개소, 퇴촌면 67개소, 실촌면 41개소, 도척면 22개소, 초월면 51개소, 중부면 20개소, 광주읍 14개소 등이다.
조선 초기의 가마터로는 번천리·우산리·도마리·무갑리가 있고, 중기의 가마터로는 선동리·상림리·신대리·금사리 등의 가마터를 들 수 있다. 후기의 관요로는 영조(英祖) 28년(1752) 이후 남종면 분원리에 고정되어 고종(高宗) 21년(1884) 민영화하기 전까지 운영되었다. 자기편은 양질의 상품(上品) 백자뿐 아니라 중품(中品)도 채집·출토되며, 순백자(純白磁)·상감백자(象嵌白磁)·철화백자(鐵畵白磁)·청화백자(靑華白磁) 등과 청자와 분청사기 등의 다양한 종류이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도자기 변천 과정을 살피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며 앞으로 활발한 연구 성과가 기대된다. 또한 급격히 파괴되는 유적지에 대한 보존 대책도 시급히 마련되어야겠다.
※광주조선백자도요지→광주 조선백자요지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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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광주시청
광주(廣州)의 조선시대(朝鮮時代) 분청자(粉靑瓷)와 백자요지(白瓷窯址)는 광주시(廣州市)를 중심(中心)으로 퇴촌면(退村面), 중부면(中部面), 초월읍(草月邑), 도척면(都尺面), 곤지암읍(昆池岩邑), 남종면(南終面) 일대(一帶)에 200여개소에 산재(散在)해 있다. 1920년대(年代) 이래 조선백자요지군(朝鮮白瓷窯址群)으로 널리 알려진 이래 관심 있는 국내외 학자들의 답사로 항상 주목되어 온 곳으로, 그동안 뜻있는 분들의 조사(調査), 보존(保存)작업에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도시화, 산업화에 따른 파괴 역시 적자 않아 그중 대표적인 가마터를 조사하여 1985년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광주요지(廣州窯址)는 조선 초기의 분청자요지(粉靑瓷窯址)들과, 조선 초기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의 관영사기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인 분원(分院)의 설치, 이동에 따른 백자요지군(白瓷窯址群) 그리고 약간의 질그릇가마터와 근현대(近現代)의 백자(白瓷)가마터들로 핵심(核心)은 경안천(慶安川)의 지천인 번천(樊川), 우산천(牛山川), 곤지암천(昆池岩川)의 좌우 구릉일대에 널려있다.
분청자(粉靑瓷)의 가마터로는 번천리(樊川里), 도마리(道馬里), 도수리(陶水里), 관음리(觀音里), 쌍동리(雙東里), 학동리(鶴東里) 등에 남아있으며, 15세기(世紀)의 상감(象嵌), 인화분청자(印花粉靑瓷)들로 백자(白瓷)가 발달되기 전의 가마터들로 주목되는 곳이다.
광주조선백자요지 사진백자(白瓷)의 가마터로는 15세기(世紀) 상감백자(象嵌白瓷)를 제작하던 번천리(樊川里), 우산리(牛山里), 무갑리(武甲里), 목현리(木峴里), 도마리(道馬里) 요지(窯址)들로 선구적인 조선백자(朝鮮白瓷)의 제작지가 있으며, 분원(分院)이 15세기후반에 설치되면서, 16세기전반까지 활동하였던 우산리(牛山里), 도마리(道馬里), 도수리(陶水里), 학동리(鶴東里), 신대리(新垈里), 무갑리(武甲里), 오전리(梧田里), 번천리(樊川里)의 가마터가 있어, 초기의 청화백자(靑畵白瓷), 양질(良質)의 백자(白瓷)접시, 항아리, 병(甁), 사발 등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후반에서 17세기말까지 활동하였던 가마터로 관음리(觀音里), 대쌍령리(大雙嶺里), 정지리(亭支里), 탄벌리(炭筏里), 상림리(祥林里), 선동리(仙東里), 송정리(松亭里), 유사리(柳寺里), 신대리(新垈里), 지월리(池月里)의 백자요지(白瓷窯址)들로 중기(中期)의 회백색(灰白色)의 백자(白瓷), 철화백자(鐵畵白瓷)의 제작이 중심을 이룬다.
조선후기(朝鮮後期)인 18세기의 관음리(觀音里), 오향리(五香里), 금사리(金沙里), 분원리(分院里) 1요지(窯址)와 19세기(世紀)의 분원리(分院里) 2요지(窯址)의 설백색(雪白色), 청백색(靑白色)의 백자(白瓷)와 청화백자(靑畵白瓷)의 항아리, 술병, 접시 필통, 연적, 제기 등의 다양한 예들, 동화백자(銅畵白瓷), 철유(鐵釉), 흑유(黑釉) 등이 제작되었다.
이처럼 광주일대(廣州一帶)는 조선초기(朝鮮初期)부터 후기(後期)에 이르기까지 분청자(粉靑瓷), 백자(白瓷), 청화백자(靑畵白瓷), 철화백자(鐵畵白瓷), 동화백자(銅畵華白瓷)의 각종 기형(器形)과 문양(紋樣)이 시문(施紋)된 양질(良質)의 뛰어난 도자기(陶瓷器)들이 제작되었던 곳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였던 분원(分院)의 제작활동이 남아있는 조선백자(朝鮮白瓷)의 핵심(核心)이며 조선도자연구(朝鮮陶瓷硏究)의 기반이 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