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보정리 소실유적은 공동주택 신축공사를 위한 벌목작업에서 유물이 노출되어 구제발굴조사 하였다. 발굴조사 후 성호샤인힐즈아파트가 건립되었다. 가까운 곳에 사적 제500호로 지정된 용인 보정동 고분군이 있다.
소실유적에서 확인된 유구는 삼국시대 석실묘 16, 석곽묘 6기, 백제주거지 7기, 수혈 23기, 고려시대 석곽묘 5기, 조선시대 주거지·묘·가마·적석유구·석렬유구 등 총 127기이다.
유적이 위치한 곳은 한강에 합류하는 탄천 상류이다. 이곳은 고구려의 滅烏→신라의 巨黍→고려의 龍駒→조선의 龍仁으로 이어지는 읍치에 해당하며 교통로로 볼 때 수도 서울과 영남을 잇는 영남대로 상에 자리한다. 과거 용구현의 읍치가 구성 일대인 점을 감안하면 본 유적은 당시로는 소위 부도심권에 속한다.
백제 주거지와 수혈에서 출토된 유물은 발형토기·장란형토기·시루편 동시기 중심지역과 주변지역의 문화상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로 평가된다.
수혈에서는 소토와 목탄 및 곡물흔이 확인되어 상시적이지는 않지만 일시적 炊事의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는데 수혈의 기능, 용도와 관련한 유용한 자료이다.
삼국시대의 석곽묘와 석실묘는 소실유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유구로 일부 도굴의 피해를 받았지만 고고학정보가 잘 보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축조방식은 여주 매룡리 지역의 그것과 상통하나 유물조합은 파주 성동리와 연결되는 특징을 지닌다.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이후 지역집단의 지배와 묘제ㅇ에 일정한 차이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으며, 지역에 따른 신라문화의 이식에도 지역적인 편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유적과 지형적으로 연결되는 보정리 고분(토지박물관 발굴)은 동시기에 축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묘제에서는 차이가 드러난다. 소실유적은 횡구식석실묘가 주로 조영된 데에 비하여 보정리 고분의 묘제는 횡혈식석실묘이다.
8호, 17호 횡구식석실묘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21호 횡혈식석실묘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8호에서는 8세기로 편년할 수 있는 토제 대부발과 당식대금구 형식을 따르는 장방형 과판와 대단금구가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23호석곽묘에서는 해무리굽 완을 포함한 고려백자 6점을 비롯하여 완벽한 형태의 잔탁과 잔, 광구병, 토기완, 청동 숟가락 등이 일괄로 출토되었다.
해무리굽 완의 편년에 근거할 때, 11세기에 조영된 무덤으로 판단되며 용인 청덕리 고려고분(10C)에서 마북리 고려고분군(12C)으로 발전하는 중간단계의 무덤양식으로, 용인지역 고려 무덤의 양식변천과 부장유물의 변화양상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소실유적은 다양한 유구가 확인된 복합유적으로 고대와 중세 읍치 주변의 지방문화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더 나아가서는 고대와 중세의 읍치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좋은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기전문화재연구원·(주)에스제이종합건설, 2005, 『용인 보정리 소실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