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선생순절비(尹棨先生殉節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1392-1번지이다.
조선 후기의 명신 신백(信伯) 윤계(1583~1636)의 순절을 기린 비이다.
윤계는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임계(林溪) 윤집(尹集 : 1606~1637)의 형으로, 남양부사(南陽府使) 재임시 충청도 보은에 용무가 있어 갔다가 병자호란(1636~1637)의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 군비를 정비하려 했으나 적의 기습을 받아 잡혀가 끝까지 항거하다 참살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그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하고 충간(忠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현종 9년(1668)에 세웠으며 비신(碑身)은 연꽃무늬를 새긴 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우의정 송시열(宋時烈 : 1607~1689)이 짓고 좌참찬(左參贊) 송준길(宋浚吉 : 1606~1672)이 썼으며 두전(頭篆)은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민유중(閔維重 : 1630~1687)이 썼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내용 더보기
※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조선 시대 문신으로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남양부사 신백 윤계(信伯 尹棨, 1585∼1636)의 순절을 기린 추모비이다. 윤계는 병자호란의 삼학사의 한 사람인 윤집의 친형이다. 인조 2년(1624) 과거에 합격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상소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그후 이조좌랑을 거쳐 1636년에 남양부사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병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인근의 고을을 약탈하며 남양에 침입하였을 때 윤계는 군사를 모집하여 남한산성을 향했으나 패하여 포로가 되어 꿇어앉도록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윤계는 “머리를 잘리는 한이 있어도 무릎은 꿇을 수 없다”고 하여 혀가 잘려져 순국하였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순절비의 모양을 보면 윗부분이 타원형으로 되어 있고 비 갓이 없다. 근래까지 비각이 있었던 듯 비문의 글자가 오랜 세월을 경과하였음에도 선명하며 마멸이 심하지 않다. 전액은 인형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이 썼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화성시 문화재 편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