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장선생묘(白天藏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8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7번지이다.
수원백씨(水原白氏)의 시조인 백우경(白宇經)의 후손으로 수원백(水原伯)에 봉해진 백천장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근래의 정화 공사로 각종 석물이 새로 배치되어 고려 후기의 묘제 양식을 찾아볼 수 없다. 오래된 석물로는 묘비·장명등·문인석 1쌍이 전부인데, 묘비는 그의 17세 후손인 백홍수(白鴻洙)가 조선 순조(純祖) 13년(1813)에 세웠으며, 장명등과 문인석도 묘비를 세운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세운 석물로는 1980년에 건립한 오석제(烏石制) 묘비와 장명등·호석·상석·향로석·석양(石羊)·망주석·문인석 각 1쌍이 있다. 묘역의 오른쪽 북방 50m 지점에는 수원백씨의 원시조 사당인 송계공단각(松溪公壇閣)이 있고, 묘역에서 200m 떨어진 진입로에는 1975년에 건립한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백천장은 고려 말에 진사(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하고, 원나라에 유학하여 그 곳에서 우승상(右丞相)을 지냈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연로해져 원의 순제(順帝)에게 고국에 돌아갈 것을 청원하여 귀국한 후 수성백(隨城伯)에 봉해졌다. 고려 조정에서도 평장사(平章事)에 수원백을 봉하여 이후로 수원은 백씨(白氏)의 사패지(賜牌地)가 되었다. 이후 수원에 기거하다가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융릉(隆陵)으로부터 10리 이내의 산소는 모두 이장하게 되었으나 그의 묘소는 조정에서 보호하여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