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 동사지(河南 桐寺址)는 사적 제35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하남시 서하남로418번길 73(춘궁동 457-3번지)이다.
동사지가 위치한 춘궁동은 예부터 ‘고골(古谷)’ 또는‘궁마을’로 알려져 오던 하남시 춘궁동 고골저수지와 인접한 지역 일대로서 보물 제13호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12호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 금당지(榨堂址), 현재의 사찰인 대원사 법당이 있는 중심구역(제1사지)과 저수지를 거쳐 대원사로 오르는 중심구역 앞쪽 지역(제2사지), 절 우측으로 돌아 마애불상이 있는 지역(제3사지), 석탑 동쪽 순환도로변 지역(제4사지) 등 네 구역의 절터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절터일 가능성이 큰 이곳은 도로 건너편에 이성산성(二聖山城)을 비롯하여 동쪽으로는 춘궁동 옛 마을과 남한산성(南漢山城), 서쪽으로는 몽촌토성(夢村土城)과 암사동선사주거지(岩寺洞先史住居址) 및 백제고분군(百濟古墳群)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사역 일대에 백제시대의 토기편과 기와편이 산재해 있어 백제의 첫 수도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1983년 명문(銘文)이 있는 기와의 공개를 시작으로 비로소 ‘광주동사(廣州桐寺)’로 추정되어 온 이곳은 1988년 4월부터 7월까지 동국대학교박물관이 실시한 판교~구리간 순환고속도로 발굴조사 때에 ‘동사(桐寺)’와 ‘동사(同寺)’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동사’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발굴조사는 1·2·3·4사지로 나누어 절터의 건물터 및 건물 규모를 확인하는 정도의 성격으로 진행되었는데 도로점용부지 및 밭 경작지에 대해서는 전면 발굴을 실시하고, 발굴이 용이하지 않은 건물터와 중첩되어 법당이 들어서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시굴을 실시하였다.
전체 절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제1사지는 동쪽으로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위치해 있고 서쪽에는 주춧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는 금당지를 포함한 세 구역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먼저 현재의 법당 건물과 맞물려 있어 일부분만 살펴볼 수밖에 없는 금당지는 총 54개로 추정되는 주춧돌 중 19개가 발견되어 어칸의 너비가6.3m인 정면 7칸(28.9m), 측면 6칸(20.8m) 규모에, 정면 34.3m·측면 26.2m에 이르는 기단부로 대형 건물터임이 밝혀졌다.
한편 금당지 안에서 장대석(長臺石)일부가 유실되었지만 불상대좌(佛像臺座)의 기단부로 파악되는 팔각 석렬(石列)과 잡석다짐이 있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한 변의 길이가 2.1m이고 지름이 5.1m에 달하는 규모로 중앙부에 큼직한 심초석(心礎石)이 놓여있는데, 가운데에 사리공(舍利孔)으로 추정되는 둥근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으나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금당지 앞쪽 솔밭에 위치한 제2건물터는 2동의 건물터와 회랑 추정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지역 여건상 전면발굴보다는 건물 내부에 해당하는 곳은 트렌치를 설정하여 표토를 제거하고, 기단부는 전면발굴을 실시하였다. 2동 중 금당지 쪽의 건물터는 주춧돌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 심심간(心心間)이 4.5m인 정면 5칸(22.5m)에 심심간 3.2m인 측면 2칸(6.4m)으로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터임이 밝혀졌다. 석탑의 동북쪽 계곡 위쪽에 위치한 제3건물터는 계단식 추정의 건물터로 우물터와 자기류편의 발견 등으로 미루어 보아 승방지(僧房址) 또는 식당지(食堂址)로 여겨지나 교란이 심하여 정확한 건물터인지 확인에 어려움이 있다.
제1사지 아래 고골저수지 쪽에 위치한 제2사지는 배 밭 형성으로 파괴가 심하여 유구 확인이 힘들었으나, 순환도로 점용부지 쪽에서 건물터 일부가 확인되고 기와와 토기편·자기편·저울추 등이 발견되어 사지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제1사지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고 여겨지는 기와편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옛 절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현재 법당의 오른쪽으로 돌아 산자락에 위치한 제3사지는 마애불(磨崖佛)이 있는 절터로 발굴하기 이전인 1987년 이곳에서 금동불상(榨銅佛像) 2구가 발견되었으며, 전실(前室)로 추정되는 마애불 앞쪽에 대해서는 전면발굴을 실시하였다. 집을 짓고 밭을 일구어 계단터 외에는 아무런 유구도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고식 기와편들이 많이 발견되어 전실이 있었음은 틀림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 동쪽 순환고속도로변 언덕에 길게 형성된 제4사지는 방형(方形) 주초석의 제1사지와 달리 원형(圓形) 초석들이 남아 있다.
지역적으로 1·2·3사지와 하나의 사역으로 보이는 이곳에서 1971년 병·완·화로·향로·접시·발·잔·대야 등 약 200여 점의 청동불구류(靑銅佛具類)들이 도굴된 뒤 국가귀속처리와 함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발굴을 통하여 출토된 유물은 대종을 이루는 기와를 비롯하여 전(塼)·소조불상편(塑彫佛像片)과 소조나발(塑彫螺髮)·토기 및 자기편·철못 등이 있다.
기와는 암막새와 수막새·암키와와 수키와·명문기와·귀면와(鬼面瓦)·연목기와로 암막새의 경우는 꽃과 열매무늬·당초무늬·꽃타래무늬·해무늬·연꽃무늬 암막새 등 다섯 종류가 있다. 봉화무늬와 연꽃무늬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수막새 중 완형 1점과 편 1점인 봉황무늬 수막새는 두 마리의 봉황이 서로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는데, 긴 부리에 S자형 몸체, 큼직한 날개와 긴 꼬리를 하여 비교적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입에는 해바라기 모양의 꽃을 물고 있으며, 발밑과 머리 위쪽으로는 넝쿨 꽃을 표현하였는데 주위로 구름 모양의 꽃무늬를 돌린 뒤 테두리를 둘러 화려함과 함께 경직된 면 또한 엿보인다.
연꽃무늬 수막새는 5엽·8엽·12엽 복판연꽃무늬 수막새와 8엽·10엽 단판연꽃무늬 수막새 등 크게 2종으로 나뉘며, 연꽃잎의 숫자에 따라 다시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서까래 끝부분 마구리에 다는 연목기와는 금당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완형은 아니지만 자방부가 큼직한데 비해 꽃잎이 상대 적으로 작으며, 표면에는 녹색계통의 유약이 산화된 채 남아 있다. 암·수평기와는 많은 종류가 발견되었는데, 암키와의 경우 대개 두껍고 어골문(魚骨紋)과 빗살문이 주를 이룬다. 수키와의 경우 역시 무늬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등 많은 양이 출토되었으나 암키와 달리 고식기와는 발견되지 않았다.
흙으로 구워 만든 소조불상편과 소조나발은 금당지 팔각대좌와 제1사지의 2건물터 남동쪽 축대 부근에서 집중 출토되었는데, 나발의 크기가 큰 점과 큼직한 주먹코로 보아 금당에 모셨던 본존불상은 대형이었음이 짐작된다. 이들 출토유물과 더불어 지상의 건조물로는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있다.
보물 제13호인 삼층석탑은 기단부(基壇部)의 일부 탑재와 상륜부(相輪部)가 결실되었을 뿐, 전반적으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하층 기단 각 면석(面石)에는 안상무늬(眼象紋)가 3조씩 새겨져 있으며, 층급받침이 3단인 탑신부(塔身部)의 지붕돌은 얇고 평평하여 섬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높직한 1층 탑신에 비하여 2·3층의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든 점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보이는 시대적 특징이라 하겠다.
보수 때 하층기단 중심부에서 발견된 납석제소탑 29기와 금동불 1구·청동상 1구·납석제 불좌상 1구·금동삼화형 뚜껑 등은 이 탑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이다. 보물 제12호인 오층석탑은 삼층석탑과 거의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는 석탑으로 삼층석탑과 달리 안정감과 섬려함이 덜 하고 1층 탑신에 비하여 2층 이상 탑신부의 체감률이 크게 떨어져 고준한 느낌이 강한데, 이러한 특징은 삼층석탑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것으로 신라 말 고려 초 석탑에서 보이는 경향이다.
기단부는 상·하 2층으로 하층기단은 높이가 낮고 넓지만 상층 기단은 높은 편으로 안정감이 떨어지며, 옥개석 역시 삼층석탑과 동일한 3단의 층급받침에 두께가 얇고 평평하여 섬려함이 덜하다. 오층의 탑신은 기단부에 비하여 좁고 높게 올라가 전반적으로 안정감이 결여된 특징을 보이지만 삼층석탑과 함께 시대적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 하남춘궁동동사지→하남 동사지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자료출처: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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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하남문화원
동사지는 하남시 춘궁동 고골저수지 안쪽 금암산(金岩山:322m) 기슭에 있다. 이곳은 예부터 고골 또는 ‘궁마을’로 알려져 왔으며, 동사지 안에는 보물 제13호 춘궁리삼층석탑과 보물 제12호 춘궁리 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동사지는 1983년 명문이 있는 기와의 공개를 시작으로 ‘광주동사(廣州桐寺)’로 추정되어 온 이곳은 5층석탑과, 3층석탑의 건립시기가 통일신라 말 이거나 고려초기의 양식을 띠고 있어 근래에 까지 고려시대 광주의 대 호족이었던 왕규와 관계된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오면서 백제시대에 건립된 절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과의 논란이 되어왔던 절터였으나 지난 2010년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문화재 대관에 백제시대의 절터일 가능성이 크다고 명시하여 논란을 잠재운 곳이다.
동사지는 1988년 4~7월까지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판교~구리간 순환고속도로 발굴조사 때에 ‘桐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銘文)기와를 발견하여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로 이어져 내려온 절터임이 확인되었고, 금당지와 현재의 사찰인 대원사 법당이 있는 중심구역, 저수지를 거쳐 대원사로 오르는 중심구역 앞쪽지역, 절 우측으로 돌아 마애불상이 있는 지역, 석탑 동쪽 순환도로변 지역 등 네 구역의 절터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다른 문헌에 동사라는 절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이 절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주변엔 이성산성을 비롯하여 동쪽으론 춘궁동 옛마을과 남한산성, 서쪽으로는 몽촌토성과 암사동선사주거지, 백제고분군이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미사동 선사주거지와 백제유구등이 발굴되어 이곳 또한 한성백제 시기에 조성된 사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과 고려시대의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간의 논쟁이 뜨거웠던 지역이다.
그러나 건물터들의 발굴결과 금당지는 총54개로 추정되는 주춧돌 중 19개가 발견되어 정면 7칸(28.9m) 측면6칸(20.8m)에 이르는 기단부로 대형 건물터임이 밝혀졌다. 한편 금당지 안에서 장대석 일부가 유실되었지만 불상대좌의 기단부로 파악되는 팔각석열과 잡석다짐이 있는 유구가 발견되었는데, 한변의 길이가 2.1m 이고 지름이 5.1m에 달하는 규모로 중앙부에 큼직한 심초석이 놓여있는데, 가운데에 사리공으로 추정되는 둥근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으나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발굴단에서는 이 유구를 두고 불상대좌였을 것으로 추정하나 일부 학자들은 팔각불상좌대가 팔각형 안에 심초석이 있고, 팔각주위에 원형이 둘려져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배치된 초석들이 동서27m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어 이를 고구려의 금강사지 목탑지와 비교하여 백제의 목탑지였음을 강하게 주장을 하고 있어 아직 이 유구에 대한 정확한 명칭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태다.
금당지 주변의 남동쪽 축대부근에서는 소조나발이 발견되었는데, 크기가 큰 것으로 보아 금당에 모셨던 본존불상의 규모는 매우 큰 대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더불어 주변의 다른 건물터들 또한 규모가 20m가 넘고 있어 매우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노출된 금당(金堂)터와 불대좌(佛臺座, 팔각대좌석), 건물터 등 유구(遺構)의 상태로 보아 건축양식 또한 독특하여 한국 불교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백제문화연구회에서 치미조각을 발견하여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한 결과 건축공학상 황룡사의 치미보다도 크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1993년 당시 여름, 가뭄으로 동사지의 저수지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났는데, 그 언저리에 토기와 와편들이 즐비하여 현재의 저수지 일원 전체가 동사지의 영역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어 그 규모는 상당히 넓고 거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두 석탑의 동쪽 순환고속도로변 언덕에 길게 형성된 건물지에서는 금당지 주변의 방형 주초석과는 달리 원형 초석들이 남아있는데, 지역적으로 다른 건물지들과 함께 조성된 사역으로 추정하는 이곳에서 1971년 병, 완, 화로, 향로, 접시, 발, 잔, 대야등 200여점의 청동불구류들이 도굴된 뒤 국가귀속처리와 함께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발굴을 통하여 출토된 유물은 대종을 이루는 기와를 비롯하여 전, 소조불상편과 소조나발, 토기 및 자기편, 철못등이 있다. 특히 기와는 암막새와 수막새, 암키와와 수키와, 명문기와, 귀면와, 연목기와로 봉황무늬를 비롯한 연화문, 당초문, 넝쿨무늬등 그 문양의 화려함이 돗보이며, 연꽃무늬 수막새는 5엽, 8옆, 10엽, 12엽등 다양하여 상당히 공을 들인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이 주변에서 기존의 추정과는 달리 그 년대가 시기적으로 앞선 기와편들이 다수 별견되는 점으로 보아 백제시대의 옛 절터일 가능성이 크다고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문화재대관에 명시하고 있어 백제시대에 건립하여 고려시대에 오기 까지 계속 보수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하남지역은 옛 한성백제시기의 첫 수도인 위례성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