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반월성(抱川 半月城)은 사적 제40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3290번길 19(구읍리 산5-1번지)이다.
반월산성은 포천시의 청성산(해발 283.5m), 일명 ‘반월산’에 있다. 반월산은 포천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포천시가지와 주변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장대지와 애기당지가 있는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능선이 뻗어서 내려가는데 이 중에 주능선은 거의 동서방향으로 뻗어 내리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남쪽이 내만 되고 북쪽으로 활처럼 돌출되어 있다.
반월산성의 성벽은 정상부에서 주능선의 북쪽 사면을 따라서 축조되었고 남쪽은 내만 된 계곡 상면을 가로질러서 전체 형태가 마치 반달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산 아래에서 산성으로 올라오기에 가장 완만한 통로는 주능선을 따라서 올라오는 것이다. 북쪽과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통행에 어려움이 있다. 남쪽은 계곡이 자리 잡고 있어서 중턱까지는 통행이 수월하지만 6부 능선 이상은 역시 급경사 지대이다. 따라서 남쪽 계곡을 따라서 올라오더라도 6부 능선에서 다시 동쪽으로 뻗은 주능선으로 올라가야 정상부로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반월산성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되었던 여러 책에 고성·산성·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1618년(광해군 10)에 고쳐 쌓고, 1623년(인조 1)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樮藜室記述)』·『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견성지(堅城誌)』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대동지지』에는 성지(城池)가 현의 북쪽 1리에 있고 성산은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여기에 옛 성이 있고 둘레가 1930척이며 우물이 2개소이고 1618년(광해군 10)에 영평에 감영을 두고 이 성을 수축하였으며, 중군을 설치하였고 1623년(인조 1)에 혁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성산고성이 현 북쪽 1리에 있다고, 돌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월산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척이고, 가운데 우물이 2개소 있다고하여 『대동지지』와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618년(광해군 10)에 산성을개축하여 주진으로 삼았고, 중군을 설치하였다가 1623년(광해군 15)에 혁파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당시에 군사 요새로서의 쓰임새가 다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견성지』에는 고성(古城)이 관아 뒤의 반월산에 있는데 둘레가 1,937척이며 언제 처음 축성하였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있다. 사방으로 갈라져 있으며 가파른데, 천 여명을 충분히 수용할 정도라고 서술되어 성의 축조 당시 군사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막연하게 추측할 수 있는 근거를 남겼다. 그러나 주변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궁예가 태봉국의 서울이었던 철원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하여 1990년대 초반까지도 궁예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94년 지표조사에서 산성 내부에서는 다량의 삼국시대 토기와 기와가 수습되어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지표조사가 실시된 이후 이를 바탕으로 반월산성에 대한 장기 조사계획이 수립되었다. 처음에는 5차례 정도 발굴조사가 계획되었지만, 예상보다 많은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6차례에 걸쳐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밖에도 성벽을 복원하기 위하여 동벽 부근에 대한 시굴조사도 실시되었다. 반월산성은 둘레가 1,080m·동서 490m·남북 150m 정도로 삼국시대 산성중에서는 비교적 큰 산성에 속한다. 성벽은 대체로 반월산 정상부 7~9부 능선을 감싸고 축조되었다. 북쪽은 돌출하고 남쪽은 오므라들어서 반월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고도는 북벽이 반월산 북쪽 9부 능선을 따라서 축조되어 가장 고도가 높고 남벽이 7부 능선을 따라서 축조되어 가장 고도가 낮다. 성 내부 평탄지는 가장 고도가 높은 북벽 중앙의 장대지를 중심으로 동·서·남 세 방향의 계단식으로 형성되어 있다. 평탄지에는 기와나 토기편이 흩어져 있어서 대부분 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건물터는 서쪽 끝 헬기장 주변과 동쪽 끝 동문터 및 동치성 주변에 있었다. 이 밖에도 남벽 중앙에도 비교적 넓은 건물터가 있었다. 반월산성에서 조사된 성벽은 외성벽과 내성벽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 내성벽은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봉우리(애기당지가 위치한 동쪽 봉우리)부근에서 출토되었다. 외성에서 갈라져 나와 봉우리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 사면을 감싸듯이 진행되다가 사라졌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지,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지,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지 등이 있다.
반월산성의 축조재료는 대부분 석재이며 성벽 축조방법으로는 협축법(夾築法), 편축법(片築法)이 동시에 사용되었으며, 경사가 급한 곳에는 유단식 축조법을 일부 사용하였다. 특히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지형에는 암반을 굴착하여 수직에 가깝게 단을 조성한 후 성벽을 축조하고 있다. 성벽은 주로 장방형 쌓기를 하였는데, 성돌의 틈이 보이지 않도록 면과 모를 맞추어 축조하였다. 뒤채움돌은 자연석을 채석한 석재이며 막돌허튼층쌓기와 잔돌끼움쌓기를 혼합한 형태로 조밀한 축조방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벽의 길이는 약 453m에 달하며 성내의 가장 낮은 지점을 포함하고 있다. 남벽의 축조방법을 살펴보면, 외곽지형이 완만한 경사지는 내외협축(內外夾築)공법으로 축조하였고, 계곡부와 같은 급경사 지역은 편축법으로 축조하였다. 남벽의 높이는5.3m로 이 성벽을 보강하기 위한 보조석축이 시설되었다. 서벽의 길이는 약 70m로 내외협축하였는데, 높이는3.5~4.5m 정도이다. 북벽의 길이는 약 410m에 달하는데, 내외협축과 편축법이 교차로 나타나고 있으며, 비교적 양호한 지점은 그 높이가 3.7m에 이른다. 동벽의 길이는 약 150m로 계곡 상단과 능선을 감싸고 있는 관계로 내외협축 및 편축법에 의하여 축조되었는데, 그 높이는2.8~3.5m이다. 대체로 원래의 지형에 따라서 협축법과 편축법을 구분하여 사용하였지만 세부적인 축조 방식은 협축이나 편축이나 차이가 크지 않다.
문터는 남문터와 북문터의 2개소가 확인되었다. 남문터는 남벽부에서 서쪽으로 회절하는 지점에 설치되었으며 청성산의 서북편에서 서북벽을 따라 발달된 능선을 고려하여 시설된 것으로 반월산성의 주된 출입문으로 추정된다. 문터 좌우의 성벽 상단에는 초석으로 추정되는0.78×0.87m, 0.71×0.93m 크기의 석재가 각각 1개씩 남아 있는데, 문루(門槰)를 시설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생각되며, 초석간의 거리는 8.3m로 파악되었다. 현존하는 성문의 규모는 폭 상단 7.5m, 하단5.3m, 높이1.4~1.6m이다. 북문터는 성내에서 가장 넓은 평탄대지의 북벽부에 시설되어 있으며, 평거식 성문으로 추정되는데, 성 안으로 들어가는 측벽의 통로 길이는 약 6.4m이며, 성문 폭은하단에서 1.8m, 상단에서 1.5m로 나타나고 있다.
문터의 양쪽 측벽은 잘 치석된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다. 치성(雉城)은 남치성·서치성·북서치성·동치성의 4개소에서 확인되었다. 남치성은 남벽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나 전면 및 좌우측벽이 완전히 허물어져 전면 하단에서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규모는 체성에서 8.8m 돌출하여 전면 너비13.9m, 현존 최고 높이 5.5m이다. 서치성은 서벽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치성의 규모는 체성에서 4.6m 돌출하여 전면 너비 14.34m, 현존 최고 높이 4.6m를 나타내고 있다. 이 서치성은 17세기 초에 수축된 부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북서치성은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회절부에 위치하며 북문터와 60m, 서치성과 30m 거리를 두고 북쪽 능선에 점하여 시설되어 있다. 치성의 규모는 체성에서 8.65m돌출하여, 전면 너비 9.2m·현존 최고 높이 2.9m를 나타내고 있다.
이곳은 북·서방향을 관측할 수 있는 지형적인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동치성은 동벽이 남벽으로 회절하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치성의 전면은 3~4단에 높이 0.7~0.86m, 길이 5.4m의 성벽이 잔존하고 있다. 동치성의 규모는 체성에서 5.9m 돌출하여, 전면 너비 6.6m, 현존 최고 높이는 4.5m를 나타내고 있다. 반월산성 내에서는 모두 6개소의 건물터가 조사되었으며, 장대지는 성의 서편과 북쪽의 2개소에서 확인되었다. 서쪽의 장대지는 성내에서 가장 넓은 평탄대지를 형성한 서편 돌출형 대지의중심부에 동서 18m, 남북 13m의 원형에 가까운 평탄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쪽의장대지는 성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남북 13.4m, 동서 30.1m의 장방형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밖에 우물지 2개소 및 수구지 1개소, 회곽도, 보도시설이 확인되었다. 반월산성은 전체에 걸쳐 성체 위로 회곽도가 시설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도로의 좁은 곳은 4~5m이나, 대부분7.5~8m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북벽의 일부 구간에서 길이 14m, 너비0.8~1m 크기의 자연적으로 깨진 돌을 부석(敷石)으로 이용한 보도시설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는 거의 파편 상태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백제토기 고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편들은 많이 있다. 특히 6차 발굴조사에서는 동문터 주변을 조사하면서 장란형토기·심발형토기·원저단경호 등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초반에 걸치는 백제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산성의 초축 시기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장란형 토기류는 연질 소성되어 있으며, 태토 구성도 굵은 석립(石粒)이 다량으로 섞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장란형토기는 자비용기로서 내외벽에는 검은 그을음이 많이 남아 있다. 파편을 수습하여 복원한 장란형토기 중 기형파악이 완전한 것은 3점 뿐이다. 구연은 외반하였고, 구순은 편평하게 마무리되었거나 가는 홈이 돌아간 예도 있다. 동체 전면에는 승문이 타날되고 저부에는 격자문이 타날되고 있다. 승문은 제작 도구에 따라 다양한 꼬임문양이 관찰된다. 얇고 가늘게 된 것부터 굵게 꼬인 것까지 다양하다. 장란형토기 이외에도 심발형토기도 출토되었으나 기형복원이 되는 것이 없고 대부분 파편이어서 전체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고배류는 유개식 고배가 대부분이다. 고운 회백색 연질계의 낮은 굽다리가 달린 고배와 원추형의 높은 굽다리가 달린 회청색 경질고배가 있다. 제작상의 특징으로는 배면을 대칼로 깎아 정리한 예도 관찰된다. 호와 옹류는 직구소호·광구장경호·단경광구소호 등이 있으며, 단경호류가 가장 많은 편이다.
특히 고구려의 지명과 관련하여 1995년도 2차 발굴조사에서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라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었다. 마홀(馬忽)은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설치했던 지명인데, 암키와에 양각으로 돌출시켜 글자를 찍었다. 또한 고구려로 추정되는 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장동호로 추정되는 흑회색계 구연부, 작은 파수가 달린 단지, 표면을 문질러 문양효과를 낸 황색계 동체편, 두께가 두꺼운 회흑색계 동체편 등이 있다. 점토질은 매우 고운 이질계(橹質系)로 다른 시대의 토기편과 확연한 차이가 관찰되었다.
그리고 반월산성에서 출토된 신라토기를 살펴보면 대략 6세기 중엽에서 10세기 초엽까지 정리가 가능하다. 이를 유물 분포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1단계 6세기 중엽~7세기 초반, 2단계 7세기 중엽~8세기 전반, 3단계 8세기 후반~10세기 초반경을 중심으로 구분된다. 1단계 중 반월산성에서 처음 나타나는 신라토기는 6세기 중엽경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유하는 시기인 553년(진흥왕 14)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토기군은 전국이 신라의 새로운 군사적 정치적 영향권 안으로 점차 편입이 되면서 사회문화적 파급이 이루어지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단계의 초기에는 신라가 완전하게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영향권 안에 넣기 전으로 이전의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가 혼재된 양상 속에서 전개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신라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신라의 전형적인 토기들이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은 1단 투창고배와 단각고배이다. 고배류는 6세기 중엽을 전후로 하여 굽다리가 급격하게 낮아진 단각고배가 출현하여 신라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시기에 속하는 것은 집선파상문이 돌려진 대부장경호, 뚜껑 개신부에 삼각집선문과 원문이 조합하여 시문한 뚜껑편, 반구형 개신부에 입(入)자형의 홈을 마련한 형태가 있다는 점도 제시될 수 있다. 그리고 출토된 수적형문과 반원점문이 반복 시문된 토기편은 6세기 후반, 연속 원점문과 연주화엽문이 시문된 토기편은 7세기 전반으로 나타나는 인화문의 한 특징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출토유물의 세부적인 차이는 있기는 하지만, 한강유역에서 활발하게 조사된 산성과 고분유적 등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양주 대모산성·서울 아차산성·하남이성산성·이천 설봉산성과 설성산성에서도 단각고배와 1단 투창고배·복(卜)자형 뚜껑·개신부에 삼각집선문과 원문이 조합된 양식이 나타난다. 2단계 7세기부터 8세기까지에 해당하는 반월산성 출토유물은 한강유역의 신라유물 출토 사례에서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 시기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통일하는 시기로 경주나 낙동강
유역의 토기 문화권과 동일한 지역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629년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포천을 포함한 한탄강 일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와의 전쟁 후 685년(신문왕 5)에 신라는 9주(州)의 재편성과 함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이는 곧 새로운 통치체제 하에 새로운 주군(州郡)을 설치하는 지방제도의 편성 작업으로, 포천지역에도 이 시기를 즈음하여 안정된 기반 하에 그에 준하는 행정 기관이 개편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다른 주변 유적보다 7세기 후반경에 해당하는 유물이 다량이라는 점에서 반월산성의 중요성이 추정된다. 특히 정형화된 인화문토기가 다량 출토되는 점은 기형상의 특징 변화와 더불어 왕경양식과 지역양식의 토기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이다.
8세기 이후 경주지역에서는 골호를 중심으로 매우다양하고 화려한 인화문이 시문되는데, 동체 일부에 시문되던 것을 전면으로 빼곡하게 확대하여 장식적인 기능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영락문이나 운문 등이 많이 사용되는데, 반월산성에서는 운문과 조문이 시문된 원통형 그릇편이 있다.
반월산성 신라토기 중에는 3단계인 8세기 후반~10세기 초반경에 속하는 유물도 많은 편이다. 신라 후기 토기양식의 특징은 각종 병류가 유행하고 인화문이 점차 소멸하면서 무문화의 경향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유물은 목에 파상문이 있고 동체부에 돌대가 돌려진 대형호·줄무늬토기·덧띠무늬토기·편병·연질대부완·병뚜껑 등이다. 이와 같은 양식의 토기들은 전국적으로 나타나며, 타 유적에서도 거의 비슷한 층위에서 서로 공반되는 경우가 많다.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기와나 토기류 이외에도 벼루나 추, 인장 등의 석제 유물도 출토
되었다. 출토된 벼루는 방형계와 원형계로 구분되며, 인장에는 기하문을 새겨 봉인용으로 추정된다. 다양하고 풍부한 유물의 출토 사례와 더불어 벼루와 인장과 같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의 지배체제와 관련하여 반월산성의 지위를 살펴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 반월산성은 기록이나 유구와 유물이 출토 빈도가 낮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폐허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도성이 개경이었으므로 북방의 외적을 대항하기에는 포천 일대의 전략적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반월산성은 민간신앙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특히 애기당 하부에서 발견된 유구와 유물은 늦어도 고려시대 이전부터 이곳에서 제사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1618년(광해군 10)에 포천 판관 이성구에 의하여 개축되었음이 여러 문헌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1623년(인조 1) 중군(中軍)을 혁파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알 수 있는 유구는 남문터 일대와 남벽과 동문터 주변의 성벽이다. 우선 남문터 상단의 초석으로 보아 조선시대 상부에 누각이 건립된 형태로 활용되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남벽에서 확인된 회곽도와 여장시설등이 있고, 동벽 동문터 외부성벽에서도 확인된다. 석재는 성 내부에서 조달된 것이나 가공하기 어려운 석재를 사용하여 크기의 규칙성을 보기 어렵다. 그리고 매우 조잡하게 시설되었으며, 성벽의 보수나 정비는 성치성의 경우 장대석의 틈 사이에 강회를 발라 빈틈을 메우기도 하였다. 더불어 애기당지에서는 백자제기와 백자로 된 말이 출토되어 조선시대까지 여러 형태의 민속신앙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반월산성은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백제가 축조하여 4세기 후엽까지 사용하다가,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 이 지역이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면서 백제성곽에 고구려 건축물이 세워졌고,
그 과정에서 마홀군이 명시된 기와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진흥왕
이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반월산성이 신라의 북방진출에 중요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포천반월성지→포천 반월성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2권(증보판)』)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
『문화재 안내문안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