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記念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140-1번지이다.
대동법(1608~1894)은 조선 선조(宣祖)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이전에 각 지방의 특산물로 내던 공물은 국가에서의 소요 시기와 백성의 납부 시기가 맞지 않는 등 폐단이 많았다. 이에 각 지방의 대소에 구분 없이 토지의 결수(結數)에 기준하여 쌀로 환산 납부하고 산간·해안 기역에서는 무명으로 납부케 한 조세 제도이다.
효종(孝宗) 2년(1651) 영의정 김육(金堉: 1580~1658)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하여 효종의 윤허를 얻어 실시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정비하고 민폐를 덜게 하였다. 이러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삼남 지방(三南地方)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인 소사에 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의 원이름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 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이다. 비문은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짓고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 오준(吳竣: 1587~1666)이 썼다.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를 갖춘 비로 원래 현 위치에서 남동쪽 50m 지점에 있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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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평택시청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대동법은 조선후기 공납(貢納)제도를 개혁한 것이다.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또 방납(防納:상인·관원이 백성 대신 공물을 대납해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이자를 붙여 착취),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공안(貢案)의 증가 등 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의 폐단은 농민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수입을 감소시켰다. 이에 대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이이는 선조 2년(1569)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군량 부족에 봉착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공물 대신에 미곡으로 납세하도록 장려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 군량을 조달하려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선조 27년(1594),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대공수미법을 제안하고 이 제안은 1결에 쌀 2말씩을 징수하도록 하여 그 해 가을부터 전국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징수한 쌀의 양이 매우 적고 수시로 현물로 징수하는 일도 많아 1년이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농민의 공납 부담이 높아지면서 공납의 폐해는 다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은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를 재청하여 1608년 5월에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하고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9월부터 실시되었다. 중앙에 선혜청(宣惠廳)과 지방에 대동청(大同廳)을 두고 이를 관장하였는데, 경기도에서는 세율을 춘추(春秋) 2기로 나누어 토지 1결(結)에 8말씩, 도합 16말을 징수하여 그중 14말은 선혜청으로 보내고 2말은 군현에서 사용하였다. 인조 1년(1623)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도 실시되었으나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도 전라도의 대동법은 다음 해 폐지되었다.
이후 대동업의 확대 실시론이 간간이 제기되다가 효종 즉위 후, 김육·조익 등이 삼남에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강경히 주장하였다. 그래서 효종 2년(1651) 8월에 충청도에 다시 시행하게 되었다.
김육은 영의정, 우의정, 예조판서 등을 지낸 서인세력의 대표적인 정치가였지만 국가재정을 확충하고 도탄에 빠져 저항하는 백성들을 안정시킬 방법은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에 있다는 믿음을 갖고 전국적 실시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려는 노력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대동법의 실시를 둘러싸고 확연히 갈라지는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하는 수령·관료 등의 반발을 잠재워야 했고, 그를 위해서는 국왕 자신을 확고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 때문에 대동법 실시에 반대한 김집(金集) 등과는 정치적 갈등이 생겼고, 이른바 산당(山黨)·한당(漢黨)의 대립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경우도 죽은 뒤 그의 유지를 이은 서필원(徐必遠)의 노력으로 실현, 1678년에는 경상도, 1708년에는 황해도까지 실시되었다.
이 비는 효종 10년(1659) 김육이 죽은 뒤 충청도 백성들이 호서(충청도)에 실시한 대동법에 감사하여 그 은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의 본래 이름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이며, 비문은 홍문관부제학 이민구(李敏求)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吳竣)이 썼다. 본래 위치는 현재보다 마을 쪽으로 1백여 미터 아래 옛 소사원 터에 있었지만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높이는 300cm, 너비 85cm, 두께 24cm이다.
대동법 실시 뒤 등장한 공인(貢人)은 공납 청부업자인 어용상인으로서 산업자본가로 성장하여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화폐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운송활동의 증대를 가져와 교환경체제로 전환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제의 변화로 상공인층이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농민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가 와해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