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원장군묘및신도비(李大源將君墓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5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산83-6번지이다.
남해안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다가 포로가 되어 전사한 이대원(1566~1587) 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묘역을 사성(莎城)으로 둘러졌으며, 봉분은 3기가 있는데 중앙에 장군의 묘가 있고 좌우의 것은 부인의 묘이다. 중앙의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밀집되었고, 그 앞쪽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 1쌍씩 배열되었다. 조선 숙종(肅宗) 25년(1699)에 건립한 신도비는 묘역 아래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찬(撰)하고 조상우(趙相愚: 1640~1718)가 글을 썼으며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전액(篆額)을 썼다.
이대원은 선조(宣祖) 16년(1583)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선조 20년(1587) 남해안에 왜구가 침입하자 부하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20여 척의 배를 대파하는 전과를 올리고 적장을 붙잡아 수사(水使) 심암(沈巖)에게 바쳤으나, 전공(戰功)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심암의 요청을 거절하여 미움을 샀다. 다시 왜구가 홍양에 침입하자 심암의 명으로 군사 100여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격투 끝에 붙잡혀 항복 권유를 거부하다가 결국 참살당하였다. 이에 앞서 관찰사(觀察使)의 장계(狀啓)로 그의 승전이 조정에 알려져 심암은 파면되고 장군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발령되었다. 그러나 이 조정(朝政)의 명(命)이 전해지기 전에 죽었다. 이에 그를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하였으며 충신의 정문(旌門)을 내려 충절을 기리게 하였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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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평택시청
조선 선조 때의 충신이었던 이대원장군의 묘와 신도비이다.
이대원 장군은 명종 21년(1556) 포승면 내기리에서 출생하여,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22년(1587) 전라도 고흥지방의 녹도만호로 재직 중일때 왜구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뒤 가족들이 장군이 속저고리에 피로 써서 보낸 절명시 28자를 받아 고향 대덕산 밑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대원 장군묘는 포승면 희곡리에 위치하는데 희곡리는 평야지대로 산골짜기가 드물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안중 5거리에서 포승면 만호리 방향으로 진행하다 서평택 I.C입구를 지나 희곡리 이정표쪽으로 약 600m 진행하면 들어갈 수 있다.
이대원 장군의 묘역 대지는 5,140평에, 이대원 장군 동상 재실건물인 충렬재가 30평 규모이며, 이대원 장군의 사당인 ‘확충사’가 12평 규모로 이대원 장군의 묘와 신도비 등이 함께 있다.
묘지는 봉분이 3기인데, 가운데 장군의 묘가 있고 좌우에 부인의 묘가 있다. 가운데 봉분 앞에는 묘비, 향로석,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한 상석이 있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이 각각 1쌍이 있다.
묘역 아래, 이대원 장군 사당 입구에는 숙종 25년(1699)에 건립한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신도비는 전체 높이가 300cm이며, 비신은 높이 217cm, 너비 86cm, 두께 38.5cm이고 대리석을 돌감으로 이용하였다. 대좌에는 물결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글씨는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쓴 것이다. 비문에는 왜구를 물리친 장군의 공적이 잘 기록되어있다. 1980년 도지정 기념물 56호로 문화재 지정이 되었으며, 2000년 신도비각 단청과 홍살문을 신축하였다.
이대원(李大源)
생몰연대 : 1556(명종21)~1587(선조20)
이대원의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호연(浩然)이다. 1556년 3월 7일, 포승면 내기리 194번지 정문동(당시 양성현 승량동)에서 아버지 춘방(春芳)과 어머니는 정선 전씨 사이에 태어났다. 5세에서 10세까지 한문공부는 물론 ‘대곡’이라는 골짜기에서 매일같이 활쏘기와 칼 쓰는 법 등 무술을 익히고 병법공부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선조16년(1583) 무과에 급제하여 3년 뒤에는 전라도 고흥의 녹도만호가 되었다. 1587년 2월 10일 지금의 고흥 앞 바다 손죽도 해상에 왜선 20여척이 침공하자 이를 대파하였으며, 왜적의 목을 무수히 베어 1차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였다. 그 때 직속 상관으로 있던 수사(水使) 심암은 장군의 전공을 빼앗으려다 말을 듣지 않고 창피만 당하게 되자 원한을 품게 되었다.
며칠 뒤 2월 17일 경에 다시 왜적이 대부대를 결성하여 쳐들어 왔는데, 심암은 국가의 위기를 당하여 방비할 계획이 아닌 우선 이대원에게 보복할 목적으로 무조건 출전 명령을 내렸다. 이대원은 “날이 저물고 준비가 불충분하니 명일에 진격하자”하였지만, 심암은 피로한 병졸 100여명을 이 장군에게 주며 독촉하여 적과 싸우게 했다.
지혈시 원문
日暮轅門 渡來海 君親恩義俱無報
(일모원문 도래해) (군친은의구무보)
兵孤勢乏 此生哀 恨入愁雲結不開
(병고세핍 차생애) (한입수운결불개)
역문
해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 외로운 군사
힘 다하여 끝나는 일생 슬프다
나라와 어버이께 은혜 못 갚아
원한이 구름에 얼켜 풀릴 길 없네
결국 이대원 장군은 명령에 의하여 손죽도 해상에서 3일간 적과 맹렬히 싸웠지만 적은 수의 병졸로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 기를 들어 본영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렇듯 급박한 상황에서 아군의 피해만 클 뿐 당할 도리가 없자 죽기를 각오한 이 장군은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고 속적삼에 절명시를 써서 집안의 종에게 주어 고향 본가로 전하게 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대원은 최후까지 전력분투하다 적들의 역습에 사로잡힌 뒤 항복하라는 권유에 오히려 꾸짖으며 굴하지 않고 호령만 추상같이 하여 적들은 그를 배위 돛대에 매달고 참혹하게 칼로 찔러 절명케 했는데 끝까지 그의 호령소리는 바다 위를 날카롭게 울렸다고 한다. 《선조실록》22권에는 진부 김계동과 이연세 두 사람이 포로로 잡혔다가 천신만고로 탈출해왔다고 적혀있고, 《은봉야사별록》에는 그 싸움에서 오직 녹도영 병졸의 한 사람인 손대남이 살아 돌아왔다고 했으니 이장군의 마지막 절명시를 가지고 전해준 사람이 혹시 그가 아닌가 한다. 이 같은 비장한 죽음을 듣고 고흥 연안에 있는 사람들은 슬픈 노래인 녹도가를 지어 불렀다. 조정에서는 장군을 시기하여 억지로 출전시킨 좌수사 심암을 묶어다가 장군이 순국한지 44일 만에 서울 당고개에서 처형하였다고 한다.
이대원 장군의 사당 ‘확충사’
확충사는 나라를 위해 그의 젊음과 목숨을 바쳤던 이대원 장군이 사망한 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1597년 이곳을 침입한 왜적이 사당에 불을 지르자 갑자기 소나기가 와서 불이 꺼졌기에 임금이 소나기 ‘확’자를 써서 확충사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확충사는 본래 이대원 장군의 본향인 내기리 정문동에 정각을 세우고 장군의 위패를 봉안, 매년 음력 2월 20일(순국일)마다 제향을 거행하였으나 사우가 매우 퇴락하고 협소하며 주변 경관 또한 불결함으로 1978년 현 장소인 소대덕산 이대원 장군의 묘 아래에 사우를 재건하였다.
현재 확충사는 대지 5,140평에 건물 면적은 위패를 모신 사우건물인 ‘확충사’가 12평 규모로 외삼문에는 ‘충렬공사우(忠烈公祠宇)’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확충사 안에는 이대원 장군 영정과 신위가 있으며 해전도가 그려져 있다. 1980년부터 제일을 변경 매년 음력 4월 6일 평택군수(현재는 평택시장) 주재 하에 제향을 거행한다. 확충사 앞의 동상은 2002년 3월 28일 제막된 것이다. 이대원 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은 이곳 평택의 확충사 외에 전국에 3군데가 있는데 고흥의 쌍충사, 손죽도 충렬사, 여수 영당(影堂)으로 해마다 장군의 제가 올려지고 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