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楊州 檜巖寺址 禪覺王師碑)는 보물 제38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번지이다.
고려 말을 고승인 나옹(懶翁)스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가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회암사에 세운 탑비이다. 나옹스님의 부도탑과 비는 입적한 장소인 신륵사에도 있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神勒寺 普濟尊者石鍾)과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가 그것이다.
나옹선사의 이름은 혜근(慧勤), 호는 강월헌(江月軒)이다. 1320년에 탄생하였고 20세에 문경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 출가하였다. 24세에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고, 충목왕(忠穆王) 3년 원(元)으로 유학을 가서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 이르러 지공(指空)스님을 만났다. 지공(指空)은 인도 승려로 당시 원에 와 있었는데 충숙왕(忠肅王)대에 고려를 방문하였던 적이 있었다. 나옹선사는 지공(指空)스님에게서 선을 배ㅔ우고, 이후 정자사(淨慈寺)로 가 평산(平山) 처림(處林)스님을 만나 배움을 얻었다. 그 뒤에도 명주(明州)의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 등 원나라의 여러 불교성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하고 여러 절을 참배하였다. 다시 법원사로 가서 지공스님을 만나고, 공민왕(恭愍王) 7년(1358)에 귀국하였다. 공민왕 10년(1361)에 왕사가 되어 보제존자의 칭호를 받았다. 귀국 후 처음에는 은둔하고 있었으나, 공민왕의 간절한 부탁을 받고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참여하였다.
나옹의 선은 적극적인 현실참여, 실천하는 선으로 지혜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불교계 개혁의 일부는 담당하게 되었다. 공민왕 14년(1365) 4월 왕명으로 송광사 주지가 되어 고려 말의 불교계의 개혁에 나서게 되었다. 그 후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실각하자 양주 회암사로 오게 되었다. 1374년부터 회암사 중창불사를 진행하였다. 1375년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권문세족이 득세하면서 나옹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회암사 중창불사는 1376년에 마무리가 되어 그 해 4월 15일 낙성식을 겸하여 문수법회가 회암사에서 열렸다. 이 때 개경과 각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암사에 몰려들었다. 개경 가까이에서 나옹선사가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 권문세족들이 우왕을 움직여 나옹선사를 밀양 형원사로 가도록 하였다. 이것은 실질적인 유배나 다름 없었다. 나옹선사는 명을 받고 바로 출발하였으나 도중에 명으로 여주 신륵사에서 이르러 입적하였다. 우왕 2년(1376)에 나이는 57세였다. 이 비석은 우왕 3년(1377)에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동고 권중화가 썼다.
이 비석은 당나라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으로 귀부 위에 비좌를 마련하고 비신을 세웠다. 특이한 것은 이수를 다른 돌로 만들지 않고 비신 상단에 용틀임으로 대신한 것이다. 비신과 이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이수의 윗부분은 용이 몸통을 서로 휘감고 있어 둥근 모양이며, 그 밑에는 오각형의 구획을 만들어 ‘선각왕사지비(禪覺王師之碑)’라는 제액을 새겼다.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석질 때문인지 이수 조각에 비하여 솜씨가 떨어진다. 몸집은 투박하고 발을 뭉특하며 짧은 목을 가지고 있어서 볼품이 없다. 등의 귀갑문은 좌우대칭으로 정연하게 조각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귀부는 둔중하고 추상적이나 이수의 용틀임은 비교적 역동적으로 표현되었다.
나옹화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 비문은 앞면에만 음각되어 있는데 글씨는 힘있는 예서체이고 글자 크기는 가로 2㎝, 세로 1.5㎝이다.
이 비석을 1997년 화재로 인한 보호각의 소실로 이수와 함께 있는 비신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박물관에 위탁보관하고 있다. 원위치에는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모조비가 건립되어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문화재청, 2005)
『비문으로 본 양주의 역사 1. 양주금석대관(사적비, 신도비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보존』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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