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청룡사 대웅전(安城 靑龍寺 大雄殿)은 보물 제82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140(청용리28번지) 청룡사 이다.
청룡사는 1265년(고려 원종 6년)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하여 대장암이라 하였는데, 그로부터 약 100년 후 1364년(고려 공민왕 13년)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절 이름을 청룡사라 개칭하였다. 조선초기의 청룡사는 왕실의 후원이 있어 원당사찰(願堂寺刹)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지붕에 잔존하는 명문기와에는 1601년(선조 34년), 1633년(인조 11년), 1681년(숙종 7년) 등 3번의 번와공사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18세기에는 1720년(숙종 46년)에 사간도인(思侃道人)이 대웅전, 관음전, 문수전 등을 중수하고 그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를 조성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대웅전의 중수가 많이 일어났는데, 1821년(순조 21년)에 대웅전 수시를 하였고, 1849년(헌종 15년) 유관선사가 대웅전을 보수하였다. 1863년(철종 14년)에 대웅전 일전만 남아있고 대웅전마저도 연목(서까래)만 남아있어 위험한 상태여서 하월선사가 보수하였다고 <중수공덕기>에 전해진다. 19세기의 청룡사는 원당으로서의 모습이외에도 그 당시 안성에서 이름을 날렸던 남사당패의 시주도 받아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보면 왕실뿐만이 아니라 남사당패까지 후원을 받아서 발전하는 사찰임을 알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청룡사는 1942년 만하선사가 사찰을 중수하였고, 1985년 1월 8일에는 대웅전이 보물 제824호로 지정되었다.
초기의 청룡사는 대장암이라는 작은 암자로부터 시작되어 나옹화상이 중창을 한 후 현재의 서향을 한 배치가 되었고 가람배치는 아미타불의 극락당과 지장보살의 지장전이 물고기 비늘모습으로 놓여져 있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 두 공간간의 위계는 병렬하여 놓여 졌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가람배치의 원형은 조선중기의 사간도인에 의한 중수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보이며 19세기의 사찰의 쇠퇴기에 거의 폐허가 되어 현재의 대웅전만 남아있게 되고 현재의 전각들은 20세기에 들어와 시행된 중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찰의 배치는 진입부로부터 왼쪽으로 임수(臨水)하는 개천이 흐르고 개천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 높은 계단을 올라서서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나오고 마당을 지나 또 낮은 석계를 오르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게 된다. 마당의 중심 제일 윗부분에 대웅전이 위치하여 불사의 중심공간을 의미하고 있다. 청룡사의 배치는 일반적인 산지사찰의 모습과 차이가 있는데, 서양하여 배치한 점과 일주문에서 천왕문, 누각을 거쳐 마당을 중심으로 전각이 사방에 위치한 조선 후기의 배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시대에 걸쳐 수많은 중창과 중수가 이루어 졌고 사찰이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역사 등을 볼 때 기존의 규범을 지키기보다는 상황에 맞추어 필요한 건축을 시행했던 결과로 유추할 수 있다.
대웅전의 기단은 장대석을 3단 쌓고 자연석으로 마감한 기단을 축조하였으며 기단전면에는 자연석 허튼층쌓기로 화단을 조성하였고, 기단바닥은 강회가 아닌 흙으로 마감하였다. 초석은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기둥의 밑을 그랭이질하였고, 초석의 높이가 모두 다른 덤벙주초배열을 하였다. 기둥은 우주와 평주 일부에 만곡재를 치목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일반 주불전에 이러한 방법으로 기둥을 사용한 예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사용한 기법으로 쌍계사 대웅전, 동화사 대웅전에서도 볼 수 있는 기법이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기둥부재를 자연 그대로의 휘어진 목재를 사용하는 예는 청룡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는 경우이다. 다포계건축이 건물 의 높이가 주칸의 너비보다 높기 때문에 주심포계와 비교하여 볼 때 상당히 날렵하고 가늘어 보이는 것이 특징이지만 청룡사 대웅전의 경우에는 그 반대로 기둥의 높이보다 주칸의 너비가 넓어 건물이 납작하여 안정적인 느낌을 주게 한다.
평방위에는 내외의 3출목의 공포를 사면에 두어 팔작지붕의 공포형식을 보이고 있고, 공간포는 전면에는 2구씩 두었으나 배면 어칸과 측면에는 1구씩 설치하였다. 배면의 어칸과 같은 경우에는 보수시 생략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측면의 경우 협칸이 퇴칸보다 넓은데도 불구하고 협칸은 공간포가 없고 퇴칸에 존재하는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 하겠다. 주두는 일부부재에서 주두굽받침의 모양을 한 부재가 보이지만 이는 공포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주두밑을 받쳐놓은 별개의 부재이다.
제공은 4제공으로 바깥쪽의 1, 2, 3제공은 쇠서형인데, 정면의 앙서 단부에 연봉을 뭍인 형태, 배면 어칸의 1, 2제공과 같이 화두자가 없는 앙서, 배면과 양측면의 화두자가 있는 양서 등 3가지가 있다. 문살종류고 세살문이 기준으로 정자살문도 사용하였다.
대웅전의 구조는 뒷부분의 1개의 고주와 고주 앞에 3개의 대들보가 있는 구조로 7량집의 규모를 보이고 있다. 내목도리를 제외한 모든 도리가 굴도리이고, 하단은 장여에 맞추어 평평하게 다듬었다. 지붕의 구조는 대웅전의 정면은 부연을 갖춘 겹처마 방식이나 나머지 3면은 홑처마방식으로 전면성을 부각하였다. 천장은 일반적인 다포계 팔작지붕의 전각들이 보이고 있는 우물천장을 구성하는 방식과는 달리 서까래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어 낮은 충고에 따른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된다.
건물 정면의 공포는 19세기의 모습으로 살미첨차 상부의 연봉과 쇠서바닥의 초각, 용두의 장식 등으로 알 수 있고, 반면에 건물배면과 양측면의 공포는 연봉 등 장식이 없는 쇠서와 삼제공의 삼분두 등으로 18세기의 공포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추정하여 보면 1720년경의 중수로 인하여 18세기의 주된 공포사용과 그 이전 부재의 혼합적인 사용을 보이고 있다가, 19세기에 들어 황폐화된 대웅전을 다시 중수할 때 19세기의 공포의장을 정면에만 사용하여 전면성을 강조하고 후면을 간략화하였는데, 이는 19세기 사찰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단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예로 말할 수 있다.
최근의 보수현황은 1976년에 단청을 보수하였으며 1985년 기와 일부를 번와하였고, 1993년에는 평고대를 교체하는 번와공사를 하였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목조, 개정판)』)
『경기문화재총람-국가지정편(1~3)』
『(국보·보물)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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