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吳命恒先生討賊頌功碑)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안성시 낙원동 609번지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오명항(1673~1728)이 영조(英祖) 4년(1728)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평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안성의 군관민이 세운 비이다.
난이 일어나자 그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겸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가 되어 난을 토벌하였다. 그리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에 오르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우찬성(右贊成) ·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비는 원래 동본동에 있었으나 1969년 지금의 안성공원으로 이전되었다. 비분은 그의 종사관(從事官)이었던 우의정 조현명(趙顯明 : 1690~1752), 병조판서(兵曹判書) 박문수(朴文秀 : 1691~1756), 대제학(大提學) 이광덕(李匡德 : 1690~1748)이 각각 짓고 쓰고 두전(頭篆)을 했다. 뒷면에는 토벌에 참가했던 장수 · 군졸 등의 인적 사항이 병조판서 김시경(金始烱)의 글씨로 새겨져 있고 우측 면에는 군수(郡守) 민제장(閔濟章 : ?~1729)을 비롯하여 공을 세운 안성 관원의 명단이 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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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오명항(吳命恒)
생몰연대 : 1673(현종 14)∼1728(영조 4)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상(士常), 호는 모암(慕菴)·영모당(永慕堂). 영의정 윤겸(允謙)의 현손이며, 달천(達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융(道隆)이고, 아버지는 수량(遂良)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여성제(呂聖濟)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09년 교리(校理)를 거쳐 설서(說書)·사서(司書)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부수찬(副修撰), 1713년에 겸필선(兼弼善), 1715년 부응교(副應敎)·이조좌랑을 지냈다.
1716년 승지에 이어 경상도와 강원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거쳐 사직으로 있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에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4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것을 자책하고 상소하여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우리고장의 문화유적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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