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始興 芳山洞 靑瓷와 白磁 窯址)는 사적 제41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370-3번지이다.
이곳은 1990년대 초반부터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생산유적으로 해강도자미술관에 의해 1997년과 1998년 2차에 걸쳐 발굴되었다. 조사결과 청자와 백자를 함께 제작한 자기가마 1기와 더불어 토기가마 2기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지표조사 결과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다니마을과 인근의 방골에는 여러 곳의 자기 및 토기가마터가 밀집되어 있음이 밝혀져 이 일대가 집단적인 도자기 제작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방산대요로 명명된 자기가마는 남한지역에서 처음으로 벽돌을 쌓아 축조한 초기 청자가마터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해무리굽 완을 비롯하여 발생기의 청자와 백자의 총체적인 모습을 밝혀주는 다양한 유형과 기종의 파편들이 수집되었다. 특히 청자와 백자, 갑발편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퇴적더미는 고고학적인 층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퇴적 유물의 상대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서 주목되며, 이는 앞으로의 초기 청자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방산대요 인근에는 방산대요 이외에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자기 가마터와 토기가마터들이 확인된바 있어 이 지역은 한반도에서 초기 청자를 생산한 생산단지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발굴조사 결과, 자기가마는 조사당시 함몰된 천장부를 제외한 모든 구조가 잘 남아 있어 초기 청자가마의 한 유형인 벽돌가마의 규모와 운영 상태를 보여준 좋은 예이다. 가마 내벽의 폭은 약 90~222㎝이며 경사는 소성실(燒成室) 바닥이 약 15°, 굴뚝부 바닥이 10°내외로 완만한 편이다. 가마는 생토인 황토색 점토층을 약간 파고 점토를 재료로 한 직방형의 생벽돌을 모로 쌓은 다음 벽돌 사이에 약간의 점토를 메워 축조하였다. 또한 남아 있는 가마의 벽은 높이가 최고 130㎝가량으로 상당히 높으며, 벽체의 상부는 가마 안쪽으로 곡선을 이루며 좁아지고 있어 천정의 모습이 궁륭형穹形을 이루도록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가마의 봉통은 길이가 약 300m, 내벽 간 폭이 약 13㎝가량이며, 역시 벽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나 주변에 고열에 익은 커다란 돌들이 불규칙하게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이 돌들을 구조물의 일부로 사용하였던 것 같다. 봉통 바닥면에는 탄재가 모래와 섞인 채로 깔려있으며, 이 아래에는 딱딱하게 굳은 회색층의 바닥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봉통의 이맛돌 아래에는 재를 긁어내는 좁은 골이 확인되었는데, 다른 가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설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실은 바닥면이 평평한 경사바닥으로 조성되었으며, 봉통 위 불턱부터 최상단의 굴뚝부까지가 하나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까지 사용된 가마 바닥에는 부분적으로 갑발받침을 놓았던 흔적이 열을 지어 있고, 소성실의 좌우측 벽에는 약 1m씩 벽돌열이 끊어져 있는 부분이 4.4m가량의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어 가마의 좌우벽에 각각 7개씩의 출입문을 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마의 끝부분에 해당하는 굴뚝은 구릉 상부쪽 비교적 경사가 적은 평지에 조성하였다. 따라서 굴뚝부분의 바닥은경사면을 따라 상승하던 가마 바닥이 점차 수평에 가깝게 완만해 지는 구조를 보인다. 한편 굴뚝의 끝부분은 ‘ㄷ’자 형태로 마감한 벽돌의 윤곽선이 명확하게 남아 있으나 벽돌 상층의 구조는 알 수 없었다. 가마는 최초의 상태에서 여러 번의 보수과정을 거쳐 개축되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축은 크게 2회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개축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사용하였던 벽돌을 재활용하여 사용한 예도 확인되었다.
토기가마는 자기가마의 남쪽 10m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전체의 2/3 이상이 지하에 있고 지붕만 일부 지상에 노출되었다. 가마는 길이6.9m·너비 2.9m의타원형의 가마로 봉통의 앞에는 직경 1m 내외의 수혈통로가 있다. 이 가마는 유구가 시흥 방산동 유적의 최하층에 위치하고 있어 토기가마의 폐쇄 후 그 위에 청자가마를 신축한 것으로 생산체제의 이행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 이 일대에 통일신라 양식의 토기편들이 널리 분포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지역이 방산대요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중요한 토기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조사를 통해 다량의 토기, 청자, 백자와 같은 도자기와 갑발 등 각종 요도구가 수집되었다. 토기류는 자기가마의 남쪽 10m 지점에 있는 토기가마의 생산품으로 추정되며 경질 또는 연질계와 무유·시유·침탄 토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짙은 회청색을 띠는 무유경질계통은 내면에 타날문이 시문되고 외면에 돌대가 있는 대형 그릇류가 많으며, 어두운 회녹색의 시유경질계통은 내외면에 문양이 없는 대신 물레자국이 나 있고 유약이 흐른 자국이 생길 정도로 전면에 시유되어 있다. 연질계 토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는데 침탄을 시켜 그릇색이 검은 토기들과 자배기와 같은 회백색의 토기들이다. 기종은 경질계 토기의 경우 항아리, 병, 뚜껑 등 비교적 다양하게 수집되었으며 연질계 토기는 항아리와 같이 대형이면서 단순한 기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기는 청자와 백자가 함께 출토되나 청자가 주를 이룬다. 청자는 비교적 치밀한 회청색 태토에 녹갈색 또는 회녹색을 띠는 유약을 얇게 시유하였고 백색내화토를 받치고 갑발에 넣어 소성하였다. 기종으로는 대접·접시·발(鉢)·대발(大鉢)·완(碗)·잔(盞)·화형(花形)접시·광구병(廣口甁)·소병(小甁)·유병(乳甁)·주자(注子)·항아리(壺)·뚜껑(蓋)·합(盒)·벼루(硯)·제기(祭器)·장고(長鼓)·잔탁(盞托) 등이 출토되었다. 이 중 대접·접시·완·잔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특히 완은 방산동 출토유물의 5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대부분은 문양이 시문되지 않았으나 초화문 계통의 문양이 시문된 예도 몇 점 확인된 바 있다. 완이나 병 같은 주요기명의 굽 안바닥에는 각종 문자가 음각명문으로 새겨진 예가 확인되었으며, 특히 갑발의 바닥면에 예리한 음각으로 각종 기호나 ‘봉화奉化’· ‘오월吳越’로 추정되는 명문을 새긴 예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청자의 생산과 관련된 각종 요도구들이 출토되었는데, 발형·원통형 등의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갑발과 갑발받침·갑발뚜껑·그릇을 받쳐 굽는 점권·갓모·봉극 등의 물레부속도구가 출토되었다.
방산대요는 이전 시기 운영되었던 토기가마와 인접하여 청자가마가 신축되었으며, 큰 시간차를 두지 않고 토기에서 자기로 생산 구조가 변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전남 영암 구림리 요지·충남 보령 진죽리 요지·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2호 요지 등에서도 확인되며 이러한 유적들은 토기에서 청자로 이행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방산대요의 전축식(塼築式)의 축요법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축요 방식인 흙으로 쌓아 올리는 토축식(土築式)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전축법은 중국의 전통적인 자가기마 축조과정에서 흔히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배천군 원산리와 봉천군 봉암리·용인 서리 최하층·고양 원흥리·양주 부곡리·서산 오사리·진안 도통리 등지의 초기청자요지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방산대요는 배천군 원산리의 전축요와 축조 및 개축의 방식이 거의 같으며, 길이가 약 40m에 이르는 가마의 규모나 구조에 있어서도 상당한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유사점들은 지금까지 확인된 중국당말오대(唐末五代) 월주요(越州窯) 가마와 유사하며 전축요를 사용한 초기 청자 가마들과 중국 월주요 청자가마 사이의 양식적인 유사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 초기청자가마 계통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용인 서리의 발굴조사 결과 벽돌가마는 전형적인해무리굽완을 생산한 흙 가마의 아래층에서 발견되어 벽돌가마가 초기 청자의 가마 중에서도선행하는 형식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방산대요는 토축식으로 이행하기 이전의 자기가마 형식이라고 판단되고 있으며, 보다 중국적인 요소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를 만드는 기법에 있어서는 모든 생산품에 갑발을 사용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현재 조사된 우리나라의 초기 청자 유형 가운데에는 갑발을 사용한 것과 갑발을 사용하지 않은 것, 그리고 갑발을 사용할 때 한 개의 갑발에 한 점을 넣은 것과 여러 점을 넣은 것이 있는데, 방산동 가마터의 경우 한 개의 갑발에 여러 점을 넣고 포개어 구운 것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초기 청자요업의 한 가지 유형으로 당말오대의 갑발 사용법과 가장 가까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갑발을 비롯한 요도구의 종류도 다양한데, 특히 발형 갑발과 버섯형의 도지미(陶枕), 고리모양의 점권 등이 발견되었다. 층위조사 결과 상층에서는 원통형의 갑발이 주로 발견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점차 발형 갑발의 사용이 감소하고 원통형 갑발의 사용이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형 갑발은 원산리와 용인 서리의 발굴조사에서도 발견되었으나, 강진 용운리, 고창 용계리 등 원통형 갑발의 한국식 해무리굽 완을 생산하는 가마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중국식 갑발이다. 갑발의 사용은 중국으로부터 고급 자기 제작 기술이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후기의 퇴적층에서 출토되는 고리 모양의 점권은 중국에서 특히 오대 때 성행한 받침방법으로 방산동가마터의 운영 시기나 자기 제작 기술의 계통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출토된 유물에서도 해무리굽 완·옥연형 구연잔·화형접시·손잡이가 달린 주자 등 중국 월주요 청자와 유사한 예들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조사결과 유물의 출토 층위가 확인되며 기존의 용인서리 요지에서처럼 선해무리굽에서 한국식 해무리굽으로 이행되어 가는 양상이 나타나 중국의 월주요식 기술이 한국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청자와 백자가 동일 유구에서 발견된 점은 우리나라 백자의 발생 역시 청자와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와 같은 축요법과 제자 기술에서 보이는 중국적 요소들은 결국 초기 청자와 백자를 생산했던 방산대요가 중국의 자기 제작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특히 청자가마와 함께 발견된 토기가마는 방산동에서 통일신라의 전통이 강한 도기질의 요업체계 위에 자기를 생산하는 새로운 요업체계가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전통적인 토기 제작 기술과 중국에서 수용된 제자 기술이 결합되며 어떻게 한국화 되어 가는지를 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문화재청, 2010)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경기문화재총람-국가지정편(1~3)』
-
시흥 방산동 청자와 백자 요지.pdf (151.5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