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방화수류정(水原 訪花隨柳亭)은 보물 제170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392번길 44-6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 건립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수원 방화수류정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詩) “운담풍경오천(雲淡風經午天), 방화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조윤형(曺允亨1725~1799)의 글씨이다.
평면은 ㄱ자형을 기본으로 북측과 동측은 凸형으로 돌출되게 조영하여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꾸몄으며, 조선 헌종 14년(1848)에 중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되었다. 주변감시와 지휘라는 군사적 목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정자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다른 정자에서 보이지 않는 독특한 평면과 지붕 형태의 특이성 등을 토대로 18세기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구조는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렸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남쪽, 동쪽, 북쪽의 3모퉁이에는 5번 꺾인 팔각(八角)으로 각각 종횡의 짧은 대들보를 얹었다. 지붕 용마루의 네모진 서까래가 들쭉날쭉하여 처마를 번쩍 들고 있으며 지붕 용마루에는 망새[鷲頭]를 교착시켜 꽂았는데, 한 가운데에 3마디 절병통(節甁桶)이 까마득하게 솟아 있다. 동북쪽 평난간 밖에는 또 처마마다 판자를 깔아 성두(城頭)를 위압하고 있다. 2중으로 교란(交欄)을 설치하고 밖에는 전붕판문(戰棚板門) 16개를 설치하였는데, 만듦새는 마치 병풍을 포개어 친 것 같다. 위에는 전안(箭眼) 각 1개씩을 내고, 아래에 총안 각 2개씩을 뚫었다.
단청은 5토를 사용하였으며, 대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내면에는 절지(折枝)를 그렸고, 정간(正間)의 조정(藻井)에는 연잎(荷葉)을 받쳤다. 동북 교란 아래의 성면 벽돌 높이 7척, 두께 4척 4촌, 위 아래에 총안 19개를 뚫고 널판지를 깔았다. 아래의 서남에도 벽돌을 돌려쌓아 담을 치고 담의 남쪽에 벽돌 홍예의 작은 문을 내었다.
동쪽의 물림난간 아래에도 판문을 내고 숨었던 적병의 발사에 대비하여, 포루의 제도와 같이 하였다. 정간 남쪽 처마와 층계로 누대를 만들되 돌을 깎아서 가장자리를 둘렀다. 누대의 높이 4척, 남북의 길이 13척 4촌, 동서의 너비 16척 4촌이다. 위에 방전을 깔아 우사(射)와 읍양(揖讓)의 예를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을 유지시켰다. 대 위의 서북에 각각 고란층제(高欄層梯)를 놓아 정자의 위로 통하게 하였다. 대 아래의 동남 양면에도 4층 보석(步石)을 설치하고 그 남쪽 11보의 거리에 낮은 담을 쌓고 전문(箭門)을 내었다. 용연(龍淵)은 북성 밖에 있는데,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둘레가 210보, 깊이 6척이고,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다.
못위 성모퉁이에 방화수류정이 있고, 정자 아래에 있는 바위는 옛날부터 용머리라 하여 낚시터로 삼을 만하다. 못의 서쪽에 석각 이두(石刻 螭頭)를 설치하였는데, 물이 많이 차면 이 이두로 물을 화홍문 밖으로 뿜어내게 되어 있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제2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수원시청)
『수원시사上-역사 속의 수원』
『(국보·보물)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