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절사(顯節祠)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32-42이다.
이 사당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3학사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리는 곳이다. 나라에서는 청(淸)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갖은 곤욕 끝에 참형을 당한 3학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숙종(肅宗) 14년(1688)에 이곳에 현절사를 지었다. 그 후 숙종 25년 (1699)에 이르러 3학사와 같이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김상헌(金尙憲), 정온(鄭蘊)을 함께 모시고 있다.
현절사는 1688년에 유수 이세백에게 명하여 세워졌으며 1693년 봄에 사액되었다. 사당 본전과 동재, 서재, 협문 2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절사 일곽은 낮은 막돌담장이 층단지어 둘러쳐져 있다. 건물들은 산등성이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동고서저의 지형으로 본전과 부속건물들은 층단을 이루고 있다. 사당지역과 동, 서재 지역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폭이 적은 협문이 2개소 있는데 하나는 사당과 부속건물 지역을 구분하는 담장의 중앙에 위치하며 일각문 형식으로 본전으로 출입시 사용토록 되어 있고 밖의 것은 전면쪽 담장의 중앙에 설치되어 이곳으로 경내에 들어서게 된다. 전면쪽은 지형의 경사 때문에 높은 석축들과 계단들이 일정간격을 두고 단을 지어 설치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형태로서 홑처마 맞배지붕 형식인데 풍판을 달았다. 전면쪽은 개방된 전퇴를 두었고 출목은 없이 연화가 초각된 앙서형의 이익공과 주심첨차, 화반을 갖춘 조선후기의 익공계 양식의 공포구조인데 후면쪽은 초익공만 둔 모습이며 퇴량 보머리의 형태도 닭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후면쪽도 대량의 보머리에 붙여 이 닭머리 모양의 초각이 돌출되어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과 주축돌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열만 원기둥이고 나머지 기둥은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후면 기단과 접하여 배수로가 둥글게 설치되어 사당지역의 우수를 처리하고 있다. 가구구조는 납도리가 사용된 1고주 5량가 구조이며 내부바닥과 전퇴부분에는 포방전을 깔았으며 양측면과 후면쪽벽에는 막돌화방벽이 설치되어 있다. 출입문은 전면쪽 3칸에만 모두 궁판있는 4분합문을 달았으며 제행시에는 문짝을 접어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어 있다. 건물 내외부 모두 모로단청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본전 아래 지역에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위치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와 평면형태, 양식이 서로 엇비슷한데 부분적인 가구구조가 서로 다르다. 동,서재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으로 중앙칸에 대청을 두고 양협칸에 대칭으로 마주보고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모두 온돌방 앞에 툇마루를 설치한 모습이다. 동, 서재 모두 자연석 기단과 주춧돌 위에 각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가 사용되었다. 전면쪽에만 툇간을 둔 1고주 4량가 구조로서 홑처마 맞배지붕 형식을 하고 있는데 풍판은 달지 않았다. 그리고 동재와 서재는 종도리가 위치한 위치가 건물별로 서로 틀리므로 지붕의 종단 길이는 전, 후면이 서로 다르다. 서재의 후면 중앙칸만을 제외하곤 동, 서재 모두 양측면과 후면은 모두 막돌 화방벽을 두르고 있다.
동재와 서재의 온돌방 정면에는 모두 2짝의 세살문이 달려 있고 대청쪽으로도 1짝의 세살문이 달려 있는데 전면쪽에는 모두 머름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서재의 후면 중앙칸에는 화방벽을 설치하지 않고 외부로 출입할 수 있는 2짝 세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서로 다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동, 서재 모두 석간주와 뇌록가치로 마감되어 있고 온돌방의 천장은 반자틀이 설치되어 있다. 사당을 비롯하여 모두 기와 끝의 마감이 와구토 바르기로 되어 있어 소박한 분위기를 갖는다.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22일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1번째이며, 경기도에서는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이다.
(자료출처 :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2』
『경기지역의 향토문화 上·下』